폭력을 감지하는 문학 속 사례
문학 속 인물들을 조금만 다른 각도로 바라보면, 우리는 그들이 겪는 침묵의 고통과 조용한 폭력에 얼마나 익숙해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놀라운 건, 윤리에 대해 말하려는 나조차도 그 폭력의 구조를 너무 오랫동안 비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네 번쯤 읽었을 때가 되어서야 발견한 채식주의자 해석, 지금부터 시작한다.
『채식주의자』는 한강의 대표작 중 하나로,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문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마침내 2024년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쥐며 가장 권위 있는 문학 작품의 정점에 올랐다. 이 작품은 한 여자가 고기를 끊고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시작된다.
사회가 정해놓은 질서와 침묵의 규율을 벗어나는 최초의 균열. 사람들은 그녀를 점점 비사회적이고, 비인간적인 존재로 간주하기 시작하고, 그녀는 점차 인간이라는 테두리에서 식물의 감각으로 미끄러진다.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가 고기를 끊고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점점 비사회적이고 비인간적인 존재로 간주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세 개의 시선—남편, 형부, 언니—을 통해 분해되고 응시되는 그녀의 존재는, 인간이라는 껍데기 아래 감춰진 몸과 욕망, 억압과 침묵, 존재의 해체를 드러낸다.
"피곤해."
"그러니 고기를 먹으라고. 고기를 안 먹으니 힘이 없지."
"냄새가 나서 그래. 고개냄새. 당신 몸에서 고기 냄새가 나."
"방금 못 봤어? 나 샤워했어. 어디서 냄새가 난다는 거야?"
그녀의 대답은 진지했다.
"땀꾸멍 하나하나에서."
나는 가끔 불길한 생각을 했다. 혹시 이것이 초기증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말로만 듣던 편집증이나 망상, 신경쇠약 따위로 이어질 시초라면. 그러나 그녀가 어떤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 한강,『채식주의자』, 24P
돌연 아내의 채식 선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 물론 그의 입장에서는 평소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먹던 아내가 갑작스럽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상황이 당황스럽게 느껴졌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에 대응한 방식은, 곧바로 그것을 병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였다.
영혜가 채식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독자는 이해할 수 있다. 영혜는 꿈을 꿨다. 누군가가 사람을 죽이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죽음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지워버리는 꿈. 깨어난 뒤 꿈의 구체적인 내용은 희미해질지 언정, 그 안에 남아 있는 감정은 선명하다.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함, 그리고 그 장면을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 그녀는 그 감정을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영혜의 채식은 그 꿈을 통해 느낀 윤리적 책임감의 표현이다. 지금에서라도 고기처럼 죽어간 생명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더 이상 폭력의 공범으로 남지 않겠다는 일종의 속죄인 것이다.
하지만 영혜의 결단은 그 어떤 이해나 존중도 받지 못한다. 남편은 그것을 ‘정상성’의 틀 밖에 있는 일탈로 간주하고, 문제 해결 대신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장인과 장모 역시 ‘정상으로 돌려놓기’라는 명목 아래, 그녀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 들며 폭력의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윤리적 결단은 이해되지 않고, 대신 강요와 억압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조용히, 그러나 뚜렷하게 그녀의 삶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인간은 동물보다 더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순간을 살아가는 동물과 다르게, 우리는 의미를 묻고, 결핍을 앓고, 존재의 증명을 타인의 시선에 의탁하기 때문이다.
2부에서 형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품은 예술적 감각 자체는 분명 진짜라는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그것은 이성적인 언어로 설명되거나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종종 이상하거나 일탈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가장 본능적인 층위에 가깝다.
그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그의 동서가 마치 망가진 시계나 가전제품을 버리는 것처럼 당연한 태도로 처제를 버리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나를 비열한 놈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대의 피해자는 나라는 걸 세상사람들이 다 압니다."
동서의 말이 전혀 틀리다고는 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아내와 달리 중립을 지켰다.
아내는 정식 이혼만은 미루고 경과를 지켜보자며 동서에게 애원했으나, 동서는 냉담했다.
- 한강,『채식주의자』, 86P
규범은 본래 원초적인 충동을 절제하고 조율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역설적으로 때로는 그 규범이 동정과 이해를 짓밟고, 말해지지 않는 폭력에조차 눈을 감게 만든다. 초월은 착각이고, 문학은 그 착각을 아름답게 유지하는 기술이며, 귀신도, 신도 그저 망상으로만 취급받는 세계 속에서 결국 인간은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다.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차라리 지배하거나 복종함으로써 존재를 유지하고 그것이 옳다고 믿을 수 밖에 없다. 누군가는 명령하고, 누군가는 그 명령에 기대어 정체성을 구성한다. 주인이 없어도 스스로 쇠사슬을 채우는 노예처럼, 인간은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유는 책임을 요구하고, 책임은 두려움을 낳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망친다. 그리고 그것에 벗어나는 존재를 불편하게 여긴다. 라캉이 말한 ‘기표와 대상 사이의 틈’, 혹은 실재계—결국 그것은, 처음부터 내가 진짜로 원한 것이 아니었음을 자각하는 순간의 공허가 아니었을까.
내가 원한 줄 알았던 모든 것들이ㅡ 무너질 때, 그것을 통해 나를 증명하려 했던 순간들이 허물어지면, 인간은 침묵 속에서 무너진다. 진실은 비참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안과 결핍, 유한함의 자각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힘이다. 인간은 죽을 것을 알기에 사랑하고, 사라질 것을 알기에 예술을 남긴다.
흔적을 남기려는 그 절박한 의지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고통스럽게, 그러나 동시에 고귀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규범 안에서는 그것조차도 무너진다. 형부는 오히려 식물이 되고 싶다는 영혜의 욕망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자였다. 또한, 2부에서 영혜와 형부의 관계는 분명 동의된 본능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편하게 느낀다. 여기서 작가는 묻는다. 그 장면이 불쾌했다면, 그것은 형부의 욕망에 투영된 영혜 때문인가, 아니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났기 때문인가. 당신의 ‘불쾌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3부에서 영혜의 언니는 비로소 묻는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말이다. 그녀는 낯설어진 사물 앞에서 깨닫는다. 영혜는 정신병자가 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자였고, 그래서 낯설게 보였을 뿐이다. 이상한 것은 영혜가 아니라, 그 이상함을 견디지 못하는 우리였다.
....언니도 똑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거지.
영혜의 음성은 느리고 낮았지만 단호했다.
더이상 냉정할 수 없을 것 같은 어조였다.
마침내 그녀는 참았던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
......왜, 죽으면 안되는거야?
- 한강,『채식주의자』, 190P
인간은 지배받는 안락함을 원한다. 스스로 결정하는 불안을 견디기보다는,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평온을 택한다. 이 모순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균열이다. 그리고 그 균열을 애써 봉합하며 살아간다.『채식주의자』의 가장 슬픈 문장은 "왜 죽으면 안 돼?"라는 영혜의 물음이다.
그 물음 앞에서 그 누구도 명확하게 답하지 못한다. 그저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할 뿐이다. 나는 차라리 영혜를 죽이고 싶었다. 어설픈 희망으로 그녀를 붙들지 않고, 그 절망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왜냐하면,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괴롭기 때문이다.
그녀가 정신병원에 갇힌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다수를 불편하게 만드는 감각을 고스란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진실은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다. 침묵은 때로 모든 말보다 더 명확하다. 그러나 세상은 그 침묵을 이해하지 않았고, 애초에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외계인이 되었고, 비정상으로 규정되었고, 질서에서 이탈한 한 존재로 낙인찍혔다. 그 곁에 있어줄 사람도, 단지 옆에서 함께 울어줄 사람도 없었다. 낯섦 앞에서 침묵했고, 외면했고, 다시 체계와 정상이라는 이름의 보호막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침묵은 공모였고, 외면은 폭력이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확신을 흔드는 일이기에 언제나 불편하다. 죽음의 이유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아니, 묻는 용기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살아간다. 의미 없이, 확신 없이, 습관처럼. 그렇게, 하나둘 우리도 정신병자가 되어간다.
왜냐하면 그 허무함을, 그 진실을 인간은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 속에 있는 이에게 안락사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불쌍하다’는 말로 더 깊은 고립을 선고한다.
폭력을 고발하는 문학
체계는 진실을 지우고, 우리는 다수결과 권력이라는 이름 아래 무너져간다. 영혜에게 필요했던 것은 옆에서 함께 울어줄 사람, 이해해 보려는 단 하나의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그녀를 설득하지 않고, 무너지는 순간을 함께 아파해 줄 단 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인간이 강한 이유는 유한한 생명의 가치를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남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질 수 있는, 그 처절한 몸부림이 기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것은 체계 속에서 무너지고, 지워지고, 무뎌진다. 결국, 인간은 더 이상 타인을 위해 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살지 못하게 된다. 누구보다 생명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하나둘 정신병자가 된다. 생명이 무너지는 모습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불편한 진실을 꺼내려는 사람들의 거부감에 의해서.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사형선고가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조용히 무너지는 시간. 그때, 곁에서 말해줄 사람은 없다. 아니, 있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 세상의 무심한 침묵과 비정한 체계 속에서 신음하다가, 슬픔을 껴안은 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빈자리 앞에서, 우리는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응답해야 한다.
우리는 왜 영혜에게 가해진 폭력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해석하고 분석하는 데에만 몰두했는가. 왜 규범의 언어로만 진실을 덧칠했는가. 그리고 끝내 묻지 못했던 질문—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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