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다는 이유로 말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보내는 사유
우리는 종종 다수의 동의와 과학적 검증, 반복 가능한 결과로부터 ‘진리’에 다가섰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 위에 ‘정상’이라는 이름을 올린다. 정상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그 안에 있으면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그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단하지 않다.
중세에는 신이, 근대에는 이성이, 오늘날에는 통계가 ‘정상’을 규정했다. 시대마다 기준은 바뀌었지만, 존재의 고유한 결은 늘 그 틀에 갇혔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없다’고 단정하는 순간, 세계는 우리의 시야만큼만 작아진다. 그것은 폐쇄적인 믿음이며, 나의 감각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는 오만이다.
진리는 종종 균열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가능성을 묵살하고, “요즘 사람들은 글렀다”, “창의성이 없다”, “천재가 없다”는 말을 반복한다. 정말 그럴까? 오히려 사회가 천재들의 성장을 억압해온 것은 아닐까.
남들이 가는 길만이 옳다고 말하고, 평범하지 않은 의견과 아이디어는 틀렸다고 취급한다.
사회는 권위 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사회에 적응한 인간처럼 보이는 인형은, 통계적으로 안전한 선택을 택하면서, 정작 순간의 행복은 놓쳐버린다. 정상성은 보편을 빙자한 편향이며, 이해하려는 감각의 게으름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더 깊이 느끼고, 더 낯설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상함을 격리하는 대신, 그 안에 숨어 있는 새로운 진실을 질문해야 한다. 정상성은 언제나 ‘누가 말했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상성의 가장 은밀한 폭력이다. 권력을 가진 목소리만이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말의 진실은 점차 인물의 이미지로 대체되기 마련이다.
어떤 이는 같은 말을 해도 존중받고, 어떤 이는 그저 ‘정상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된다. 죽은 자의 흔적을 감각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를 단지 미쳤다고 할 수 있을까. 언어화되기 전의 감각, 반복 속에서 감지되는 의미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을 뿐, 충분히 사유될 수 있다.
과학은 관측되지 않는 것을 망상이라 부르고, 예술이나 애니메이션 속 세계에 그것을 유배시킨다. 그러므로 나는 글을 쓴다. 정상의 언어로는 닿지 못하는 자리에, 낯선 말 한 줄이 가닿을 수 있도록. 누군가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라고 말할 수 있도록, 오늘도 어떤 ‘미친’ 존재들의 용기 덕분에, 세상을 다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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