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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철학은 윤리로 돌아간다

말해지지 않은 것의 시간성

by 하진

ⓒ Pixabay

1) 객관성과 보편성은 환상이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흔히, 자신의 감정이나 관점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건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모든 문장에는 감정이 묻어나고, 모든 단어는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흔적을 짊어지고 있다. ‘사과’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먹는 사과, 잘못에 대한 사과, 혹은 브랜드의 이름으로 읽는다.


그렇다면 소설 속 ‘사과’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작가가 사용한 사과는 정말 우리가 떠올린 그 사과일까? 수많은 해석들을 더해도 그것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객관성조차 언제나 주관의 그림자 안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객관성의 기준에서 어긋난 감각은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어긋남이야말로, 진실의 흔들림이다.


2) 개념과 논리조차도 추상적이다.

개념과 논리조차 주관적 무의식의 표상이 될 수 있다. 이는 진리와 개념은 다수결과 권력의 구도에 갇힌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고, 논리조차도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인 관점 속에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데이터와 권위를 증명하는 싸움에 가깝기 때문이다.


3) 유일한 진리는 타자의 존재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지만, 타자만은 예외다. 왜냐하면 주체는 타자의 호출 속에서만 자신을 ‘존재하는 자’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나의 언어, 나의 이름, 나의 무의식조차도 타자의 흔적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타자는 나보다 먼저 도래하며, 감응은 그 흔적이 나를 흔드는 침입의 형식이다.


4) 말해지지 않는 진리는 문학에 머문다.

문학은 때때로 개념보다 더 많은 진실을 품는다. 우리는 문학을 읽으며 단순히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추적하고, 의심하며, 그 안에 배어 있는 침묵과 비어 있는 간극을 곱씹기 때문이다. 문학은 개념을 정의하지 않지만, 그 개념을 살아내는 장면을 선취한다.


또한, 그것은 언제나 주관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바로 그 주관성 덕분에, 우리는 다양한 시점으로부터 진리를 포위할 수 있게 된다. 하나의 평론이나 해석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해석되지 않는 여백에 머물며 의심하는 과정―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차이를 감각하며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도달한다.


5) 진리는 당연함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객관성'은 무엇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인가? 서로 다른 주체들을 통계적 평균으로 환원하고, 그 평균에서 벗어난 이들을 병리화하는 기준인가? 혹은 문학 해석에서조차도 작가의 의도를 삭제한 채 언어적 기호만을 추적하는 획일화의 규범인가?


우리가 ‘과학적’이라 부르는 것조차,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수정되어왔다. 진리를 ‘증명된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인간은 무비판적 당위 속에 안주한다. 그러나 고민하는 자는 곧 모순과 마주하게 된다.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주장하다 재판에 섰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선언 이후 철저히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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