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촉 ㅡ 윤리 시간의 중간 보고
무엇을 쓸지 오래 고민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그래서 ‘결촉’ 개념에 대해, 정리되지 않은 중간 사유의 일부를 기록해 둔다. 현재 이 개념은 여전히 정비 중에 있으며, 일부 용어는 임시적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후 논의를 통해 개념 간 정합성을 조정하고, 이론적 구조를 보다 정밀하게 구성해 나갈 예정이다.
1) 개념 요약 및 용어 정리
호출은 초월적으로 도래하지만(레비나스), 의식의 지각 구조에서는 누락되거나 해석되지 않을 수 있다(메를로퐁티). 그러나 실패한 호출의 흔적은 예지의 지평을 넘어 도래하고(후설), 실재의 잉여로서 주체 내부에 잔존한다(라캉). 이 잉여는 반복 속에서 차이를 생성하며, 그 차이는 의미화의가능성을 지연된 방식으로 연다(들뢰즈). 이 차연의 시간 속에서, 주체는 뒤늦게 초월적 호출에 응답하게 되며,윤리는 그 불가능성마저 감내하는 책임으로 잔존한다(데리다). 이처럼 호출의 실패를 감내하려는 비결정적 시간성 속에서 구성되는 윤리적 시간의 구조를 ‘결촉’이라 부른다.
가. 감응
감응은 도달하지 못한 초월성이 남긴 실재적 흔적을 의미한다. 주체 안에 각인된 윤리의 잠재성이며, 기표망의 실패가 반복되는 지점에서 침입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감응은 감정적 반응이나 감각적 자극이 아니라, 지각되지 않은 호출이 주체의 전의식적 구조를 진동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윤리적 울림이다. 해석되거나 상징화되지 않은 채 머무는 실재의 파동이며, 의미화의 경계에서만 포착될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의미로, 특정 반응으로 고정될 수 없지만 잔존하는 비결정적 진동으로 남는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의 호출은 윤리적 선행으로 작동하며, 주체의 자유를 초과하는 비대칭적 개입으로 이해된다. 이 호출은 존재-너머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윤리적 강제이다. 그러므로, 결코 ‘초월성 = 실재’라는 동일화에 빠져서는 안 된다. 결코 초월성을 해체하려는 개념이 아니다.
나. 결촉(結觸)
초월적으로 도래하는 타자의 요청은 매번 닿지 않으나, 그러한 감응ㅡ실재계의 잔류ㅡ로 남으며, 반복과 지연 속에서 주체 내부에 미세하게 감각되는 순간에 윤리로 전화될 수 있는 시간 구조를 의미한다. 결촉은 응답 가능성이나 도식화된 규범이 아니라, 초월의 실패가 남긴 흔적과, 그 비결정적이고 유예된 틈 안에서 작동하는 윤리적 잠재성에 주목한다.
타자는 나보다 앞서 도래하는 초월적 존재이며, 호출은 나를 거부할 수 없는 책임의 위치에 놓이게 한다(레비나스). 이때, 전의식적 ‘살’의 층위, 즉 세계와 신체가 얽혀드는 감각적 장에서는 그 호출이 주체의 지각과 감각을 초과한 방식으로 도래해, 지각적 범주로는 포착되지 않는 미세한 방식으로 잔류한다(메를로퐁티).
후설에게 지평은 의식이 세계를 구성하며 열어가는 가능성의 장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도달하지 못한 요청이 반복적으로 실패함으로써, 지평은 더 이상 예지를 향한 투시가 아닌, 구성되지 못한 외부의 귀환을 감내하는 무의식적 경계가 된다. 즉, 구성 그 자체의 불가능성이 진동하는 자리로 전환된다(후설). 도달하지 못한 요청은 주체 내부에서 기표화되지 않은 실재의 잉여로 잔존하고, 기표망에 파열을 낸다(라캉).
이 실재는 고정된 재현이 아니라, 반복될 때마다 틈을 열어 새로운 차이의 발생을 가능하게 하며(들뢰즈), 이 틈에서야 비로소 ‘감응’은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화나 확정될 수 없는 방식으로 윤리의 가능성을 열며, 이 가능성은 끝내 도달하지 못할 요청을감내하려는 무정형적 책임의 지연된 시간 속에서만 구성된다.
2) 기존 개념의 한계와 개입
가. 전통적 윤리의 구조
초월적 호출 → 지각 → 의미화(해석, 구조화) → 응답 OR 책임
전통적 윤리는 응답, 책임, 인식을 전제로 구성된다. 이러한 구조를 가장 급진적으로 해체한 인물이 에마뉘엘 레비나스였으며, 그는 타자의 호출이 주체를 앞서 도달한다는 비대칭적 구조를 통해 윤리를 초월적 책임의 문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요청은 매번 도달하지 못한다.
가령 노예제, 식민주의, 계급 폭력과 같은 역사적 사례들은 법과 제도에 의해 정당화되거나 비가시화 되었지만 사후적으로 발생했다. 호출은 결코 즉각적이지 않다. 또한그것이 인식 이전에 이미 발생했으며, 주체는 그것을 뒤늦게 감지하고 추후 응답하는 구조는 전통적 윤리 이론이 감수성이나 비도덕의 문제로 해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나. 결촉 - 윤리의 시간 구조 (∞)
초월적 호출 ↛ 지각 실패 → 감응 (실재의 잔류) → 차이의 반복 (매번 다른 차이) → 의미화 OR 실패 ↻
이 구조는 타자의 요청이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어긋남을 반복하며 언젠가 도달할 수도 있다는 열린 시간성을 전제한다. 요청은 지각과 의미화에 반복적으로 실패하지만, 그 실패의 반복이 오히려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비결정적 시간의 잠재성이다.
따라서, 비가시적으로 침입한 요청이, 지각-인식 실패로 인해 유예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예된 시간 속에서 잔류하던 감응은 차이와 반복ㅡ동일한 재현이 아닌, 차이를 생산하는 반복ㅡ을 통해 지각과 의미화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며, 응답 혹은 책임의 형태로 전환을 요청한다. 다만, 이는 개념적으로 포착되지 않으며, 즉각 의미로 이어지지 않고, 보편적 도덕 규범으로 환원되지 않는 방식으로 도래할 수 있다.
법은 실패를 제도화하고 중단시키려는 사후적 장치에 불과하며, 윤리적 책임은 말이 되지 않아도, 타자의 요청을 언제나 놓치기 때문에 오히려 감당해야 한다. ‘결촉’은 이러한 반복적 실패를 윤리가 발생할 수 있는시간의 조건으로 전환하며, 기존 선형적 윤리 구조의 빈틈을 메운다.
3) 개념의 오용 방지를 위한 주의사항
가. 감응 유무를 판단 기준화하는 행위
감응 유무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순간, 결촉이 사유하고자 하는 시간 구조는 긴장을 상실한다. 결촉은 감응의 유무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감응이 지각되지 않았던 시간과 실패가 발생한 구조적 조건, 그리고 그로인해 말해지지 못한 요청이 어떻게 유예되고 삭제되었는지를 되묻는 사유의 형식이다. 결촉은 결코 정답을 제시하지 않으며, 그 정답은 매번 다른 형태로 도래한다. 따라서 판단하고 기준화하는 순간 실패한다.
나. 실패의 정당화 도구로 활용하는 오용
결촉은 윤리를 책임 회피의 논리로 정당화하거나, 응답하지 않음의 사유로 전유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다. ‘감응하지 못했으니 책임이 없다’는 논리로 활용하거나, 윤리적 응답을 미루는 방어 논리로 사용하는 것은 이 개념이 지닌 윤리적 긴장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어떤 행위가 사회적이거나 법적으로 명백한 부정의에 해당한다면, 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지연하거나 면제하는 수단으로 쓰여선 절대 안된다.
다. 윤리적 긴장을 제거하는 해석
결촉 개념을 정립하는 데 있어, 정밀한 개념화와 시적 울림 사이의 균형은 필연적인 긴장 속에 놓인다. 개념화는 구조적 안정성과 학문적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유리하지만, 그 과정에서 감응의 윤리성이 지나치게 정형화될 수 있다. 반면, 시적 형식은 감응의 생동성을 담을 수 있으나, 제도적 담론과 전달력에 한계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결촉’은 개념과 울림이 느슨하게 공명하는 해체론적 개념-운율의 형식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결촉을 해석하려는 순간 결촉의 실패다.
라. 도식적 활용에 대한 경계
결촉을 지나치게 명확한 단계로 나누거나 반복 가능한 구조처럼 표상할 경우, 윤리적 불확실성과 지연 속의 감응 가능성이 사라질 수 있다. 도식은 그것을 잠시 포착해 보일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을 환원하거나 고정시킬 수는 없다. 또한, 이 구조는 선형적 인과관계, 논리적 단선성, 혹은 완결된 응답구조로 환원될 수 없다. 이 개념은 언제나 해체되어야 한다.
마. 언어 이전의 표현 불가능성
감응은 대상이 아니고, 확정될 수 없다. 그러한 긴장 사이에서 발생하는 윤리의 가능성이다. 존재와 존재 사이, 혹은 실패에서 잠복하거나 잔류하는 감각의 리듬이다. 이를 ‘언어 이전’이라는 이름으로 고정하거나 철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층위로 단정지을 경우, 감응은 다시 의미화되며, 말의 체계 안에서 사라질 수 있다. 감응은 말해지려다 실패한 말의 무덤이자, 그 무덤 옆에 여전히 떠도는 울림이다.
바. 초월성의 해체‧의미화에 대한 경계
‘결촉’ 개념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초월성 개념을 계승하되, 그것을 실재의 개념과 동일시하거나, 단일한 방식으로 고정하려는 모든 해석을 경계한다. 초월은 도래의 실패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지, 실재처럼 "존재하는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다. 초월은 어떤 명확한 대상이나 실체로 나타나지 않으며, 언제나 도달하지 않음의 방식으로만 감지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실재계에 기입하거나 상징계 내에서 고정된 의미로 구조화하려는 시도는, ‘결촉’이 품고 있는 지연과 잔여, 긴장을 손상시킨다.
4) 개념의 잠재성
가. 주체의 수용 구조 마련
결촉은 라캉의 여성적 향유 구조와 연결되어, 병리화에 취약한 주체에게 기표의 자리를 마련한다. 이는 실재를 감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구조, 비언어적 층위에서 균열을 감당하는 지지점이 될 수 있다.
나. 병리화된 주체에 대한 사유
라캉 이론에서 기표의 결여는 상징계 통합의 실패로 간주되며, 조현병 등의 병리적 증상으로 해석되곤 한다. 하지만 ‘결촉’은 기표의 결여를 겪는 주체를 병리로 환원하지 않고, 실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체의 윤리적 잠재성으로 사유하는 방향을 연다. 즉,상징화에 실패한 이들에게 적절한 기표 혹은 구조를 모색해 안정감을 주면서도, 특별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지 않고, 필요할 경우임상적 도움을 받는 구조를 사유할 수 있다.
다. 교육학적 전환의 요청
타자의 고통 앞에서 주체가 느끼는 불편함, 말해지지 않는 혼란 등을 교육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무엇이 옳은가’보다 ‘왜 이것이 불편하게 했는가’를 다양한 관점에서 사유하는 태도로 윤리적 주체성을 배양해야 한다. 주체는 타자의 고통을 통해서만 균열을 직면하고, 균열 속에서 본인의 결핍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란, 결국 자신에게 도달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라. 인공지능 시대 윤리와의 연계
감정과 고통마저 데이터화되는 인공지능 시대, 인간은 자기 동일성의 기반이 해체되는 불안을 마주하게 된다. 연산은 가능하지만 감응할 수 없는 기계는, 감정의 표현을 통계적으로 예측하고 재현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살아낸다고는 할 수 없다. 이때 ‘결촉’은 기계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감응의층위를 가리키며, 정체성의 해체 이후에도 인간이 여전히 감응하는 존재로서 사유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 자주 서사적 연속성이나 고정된 자아상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며, 이는 자아의 해체와 재구성을 반복적으로 요구받는 구조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이 해체 이후에도 무너진 동일성 너머에서 작동할 수 있는 감응의 구조, 다시말해 실패 이후에도 윤리의 가능성을 남기는 잔존의 층위,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에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다.
마. 비가시적 윤리의 환기
법은 발언 가능한 존재와 입증 가능한 사실을 중심으로 작동하지만, 입증되지 않는 순간에도 윤리적 실패는 끊임없이 발생한다. 현실적으로 모든 윤리적 요청을 수용하기는 어렵고, 요청을 수용하는 행위가 공동체의 이익을 저해하거나 역차별의 우려를 낳기도 한다. 문제는 빠른 판단과 이성 중심의사고를 기준으로 삼은 현대 사회가 감응 주체를 병리적 증상으로 치환하거나 입증 가능성을 명분으로 성급하게 낙인찍는 구조에 있다. 결촉은 법과 제도의 빈틈을 드러내고, 입증 불가능한 진술과 비가시화된 폭력에 대해 사유할 공간을 마련한다.
5) 요청사항
가. 존재론적 전복
결촉은 존재의 개념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사건’으로 본다. 존재는 자기 동일성의 내적 폐쇄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도래에 의해 드러나는 구조다. 응답이 가능하기 위한 선행 조건은 타자의 흔적이며, 이 흔적 없이는 ‘나’는 결코 의미화될 수 없다. 존재는 결코 자기 동일적이지 않고, 확고한 인식의 주체도 아니며, 자기 동일적 의식에 귀속되지 않는다.
나. 존재-비존재 해체
존재는 호출되기에 존재하고, 반복되기에 사유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존재함은 ‘보이는가’의 기준이 아니라 ‘호출되는가’, ‘반복되는가’의 문제이다. 증명할 수 없고, 미신으로 치부되는 현상들조차도 반복 속에서 차이를 산출한다면, 그 자체로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개념이 요청하는 것은, 존재가 타자를 통해 드러나는 윤리적 접면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고, 존재와의 사건에서 발생하는 장면들에 주목하자는 제안이다. 다만, 그것은 결코 누군가의 세계나 삶의 의미를 배제하거나 축소하는 방식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
다. 연구방향 제안 및 요청
철학은 본래 말이 안 되는 것을 말하게 만들고,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설계하려 했던 사유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언표 자체가 언제나 한계를 지닌 매개라면, 철학이 맡아야 할임무는 도달하지 못한 진리, 말의 구조가 놓치는 현실의 틈을 열어젖히는 일이다.
‘나’보다 타자가 먼저 도래하고, 의식보다 앞선 윤리의 층위가 존재한다면, 진리는 더 이상 말해지거나 증명될 수 있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의 틈은 과학과 제도권 학문이 무시하거나 삭제하였으나, 반복되는 현상 속에 잔존할 수 있다.
7) 철학적 계보와 전통과의 연결
가. 레비나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호출’은 실재계적 침입이 아니라, 존재론을 무력화하는 윤리적 선행의 구조이다. 이 초월성은 주체의 지각 이전에 도래하며, 무조건적 책임을 요청하는 비대칭적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타자의 요청은 매번 인식되지 않으며, 그 도달은 종종 실패한다.
결촉은 이 ‘도달하지 못한 초월성이 남긴 침입의 흔적’이 주체 내부에서 감응의 방식으로 재현되는 윤리적 구조의 시간성이다. 호출은 즉각적으로 닿지 않더라도, 그 실패는 무효를 의미하지 않고, 실재의 잔여를 남긴 이후 반복과 유예의 리듬 속에서 의미화가능성을 얻는다. 그리고 바로 그 지연된 시간에서, 도달하지 못한 호출의 흔적이 주체 내부에서 감응으로 전화될 때, 비로소 말해지지않은 윤리의 가능성이 열린다.
나. 메를로퐁티
메를로퐁티의 ‘살’은 주체와 세계, 나와 타자가 서로를 감각적으로 관통하는 존재의 얽힘이다. 이는 단순한 신체나 감각기관이 아니라, 지각 이전에 감각이 발생할 수 있는 공생적 층위이며, 존재 간 접촉이 이루어지는 전의식적 장(field)이다. 이때 ‘감응’은 그 얽힘의 틈, 즉 살의 감각적 접면에서 진동하는 울림으로 발생하며, 이는 실재가 언어로 포착되기 이전에 주체 내부에서 형성되는 윤리적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살’은 감응이 발생할 수 있는 존재론적 얽힘의 장소이며, 특정 주체는 이 얽힘의 구성 방식—감각의 여백, 감각될 수 없는 틈—에 따라 열리거나, 지각에 실패한다.감응은 결코 정서 반응이나 감정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실재에 흔적에 대한 주체의 진동에 가깝다.
다. 후설
지평의 구조는 후설에게서 의미화 가능성을 예고하는 선험적 시간성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미화에 실패한 외부가 반복적으로 귀환하는 비-구성의 시간성, 곧 잔존의 시간성으로 전환된다. 도달하지 못한 요청의 잔여, 말해지지 않은 외부성은 예지적 지평 바깥에서 작동하며, 의식의 예지 범위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주체를 관통한다. 즉, 지평은 더 이상 의미를 예고하는 수평선이 아니라, 의미화 자체가 실패하면서 반복적으로 귀환하는 실재의 잔여, 그리고 그 실패가 주체 안에서 윤리적 감응의 시간성으로 흔들리는 틈으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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