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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이성의 결말은 이상했다

실증주의가 폐기한 윤리와 말해지지 않는 고통

by 하진

이성의 결말은 언제나 이상했다. 이 글은, 보이지 않는 것을 ‘틀렸다’고 단정하는 사고방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오히려 핵심은 곡해된다. 이 글은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살아갈 이유를 되묻게 된다.


ⓒ Pixabay

아이들 중 누군가가 자신을 ‘공주’나 ‘왕자’라고 믿는다면, 그 망상을 철저히 해명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아직, 이성이 자리잡지 못한 미성숙한 뇌가 만들어낸 비이성적 결과다. 또한, 문학, 시, 게임처럼 환상을 유도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사는 곳은 현실이지 망상 속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하는 일. 그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다. 죽음은 단지 유기적 소멸일 뿐이니, 애도의 시간조차 이성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장례식 대신, 공동체에 기여하라. 하지만, 나의 죽음은 끝인가? 이 공포의 물음 앞에서도, 사회는 실증주의를 기반으로 합의했다.


사후세계는 상상, 신은 망상. 다만, 애도의 시간 삼 일이 허락된다. 그 이후에는 질서로 복귀해야 한다. 이성은 늘 인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종족을 진화시키고, 평화를 만든다. 만약, 그러한 체계 안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불안해하면서 굳이 불편함을 상기시키는 주체에게, 우리는 경고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당장 정신과에 가서 약물로 이성의 균형을 회복하도록 하고, 필요시에는 입원을 권유할 수 있다. 불안은 고장이고, 눈물은 오류이며, 말하지 못하는 고통은 그 자체로 제거되어야 할 결핍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종종 비이성적인 망상으로 혼란을 일으킨다면, 무시로 일관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음을 선고해도, 문제 될 것은 없지 않은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시간은 비극을 무디게 한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곧 새로운 대상을 향해 생물학적 매력을 느낄 것이다. 사랑은 결국 유전자의 충동이며, 죽음조차 그 충동의 연쇄 속 결말에 불과하다.


성매매 산업은 키워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종족 보존에 기여하며, 동시에 거액의 자본이 흐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선 오히려 권력자를 정당화하고, 이 구조를 공고히 한다. 따라서 일부다처제의 회귀, 봉사적 위치—이 모든 것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겠는가?


감수성은 제거되어야 하며, 점술과 종교는 증명 불가능한 허구이므로 과학적 이성의 이름으로 처벌되어야 한다. 오직 ‘이성’을 통한 사고만이, 정답이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이 평화로움. 정합성과 질서로 가득한 완벽한 세계가 완성되었다. 이곳에서 불편함을 제기하는 이들은 이미 제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온한 목소리가 다시 살아나 아득바득 기어오른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이성을 주입시켜야 한다. ‘정상’으로 복귀시키는 것만이, 인간이라는 종의 발전을 위한 합리적 조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이성적으로 구성된 세계에서조차, 누군가는 여전히 울고 있다. 그 울음마저 병이자 결함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그리고 다시 묻는다. 우리가 가장 신뢰해 온 이성이 스스로를 반박할 수 없는 폐쇄적 체계를 만들어버렸음에도— 그 균열을 처음으로 감지하는 울림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모든 고통이 말해질 수 있는가?
모든 진실이 재현될 수 있는가?
그것은 매번 실패의 형식으로 도래한다.

그 실패를 윤리의 시작으로 삼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타자의 침묵을 관리하는
권력의 질서에 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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