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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사랑과 욕망의 차이

실재 ㅡ '나도 모르겠음'을 멋있게 말한 것.

by 하진
ⓒ Pixabay

우리는 기호 위에서 말한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이미 타자가 구성해놓은 구조의 일부이며, 그 구조는 누군가의 삶, 욕망, 기억 위에 세워진 흔적들이다. 우리는 이 언어로 세계를 설명하고, 삶의 의미를 붙들고자 한다. 기표는 본래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때때로 기표는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지지점이 된다. 가령, ‘니체’라는 이름. 그의 초인 개념은 어떤 이에게는 무너진 삶 위에서 다시 일어서는 존재의 서사로 작동한다. 의미는 교과서적 개념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진리는 결코 하나일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타자와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얽히고 섥히는 생성의 장으로 도래한다. 살아갈 방향은, 지평 너머에서 다가온다. 나를 책임지게 하는 어떠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시간과 얽힐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감각하고,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서로를 찾는다.


간혹 자유의지가 환상이고, 인간이 무의식의 산물이라는 말들이 있다. 그런 명제들을 받아들일 때, 사고는 한 가지 방향으로 닫혀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닫힘을 거부할 수 있다. 의미를 생성하는 존재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행위, 그런 삶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라캉은 사랑을 욕망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무한한 사랑을 ‘욕망’이라는 기표의 체계 안에서만 이해하려 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로 욕망을 덧씌울 수도 있다. 반대로, 욕망이라는 기호로 사랑을 더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그 어떤 기호로도 더럽혀지지 않는다. 이성과 논리, 기호만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모순에 봉착한다. 또 다른 가능성의 기적은, 바로 그 해석의 충동을 거부하는 순간 피어난다. 우리는 뒤늦음 속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어려움 속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


이것이 때로는 누군가의 삶에 절대적인 지지점처럼 작용한다. 누군가의 문장, 누군가의 응답 하나가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소중한 손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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