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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사라지지 않는 목소리

침묵의 부재가 남기는 울림

by 하진
ⓒ Pixabay

발자국마다 숨결이 스며 있는 줄 몰랐다. 나의 행복은 오래전부터 수많은 이들이 쌓아 올린 길 위에 놓여 있었다.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글자를 손쉽게 쓰는 것도, 마음을 실시간으로 전하게 한 것도. 더운 여름날, 생명을 지탱하도록 만든 것도 결국 누군가의 손길 덕분이었다.


앞선 인류가 걸어간 길 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의 손끝과 발자취 위에서 살아가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다. 그 속에서 인류는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는 슬픔을, 알지 못하는 세계 앞에서는 두려움을, 그리고 마침내 서로를 위해 책임지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오늘, 그러한 가능성들이 조용히 닫혀버린다. 이유를 모른 채 살아야 하는 땅. 그저 순응해야 하는 세상. 생각하는 법은 지워지고, 남겨진 것은 외워야 하는 목소리뿐이다. 살아야 할 명분은 없지만, 죽을 수도 없다. 대답은 늘 같다. 이유 없이 살아가라는 것.


불안과 두려움은 때로 성장의 문을 열어주고, 슬픔은 성찰의 계기가 된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고통과 아픔을 충분히 겪어볼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유를 모른 채 약을 삼키면 그만이다. ‘정상’이라는 이름으로경계가 좁혀지고, 그 바깥의 목소리는 조용히 지워진다.


왜 어떤 이들은 미련한 일에 몸을 던지고, 고생을 스스로 짊어지는가.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기 때문일까. 나는 오래도록 물어왔다. 그리고, 연약해 보이는 그 얼굴이 불편했던 이유를 뒤늦게야 알았다. 그것은 나의 나약함과 무력감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침묵의 부재는 말이 닿지 못하는 자리까지 스며든다. 불현듯 찾아온 그 파문 속에서, 나는 잃어버린 목소리들을 기록한다. 누구보다 존엄했던 사람, 상처받아온 사람들에게 그 위로가 닿을 수 있도록. 끝내닿지 못하더라도, 그 실패가 지워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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