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음이 남긴 가장자리의 빛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문학을 읽거나 대화를 나눌 때마다 내면의 물결은 낯설게 일렁이고, 그 틈으로 스며든 타인의 목소리와 감각이 나를 다시 빚는다.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타자와 세계가 만나는 자리에서 비가역적으로 생성되고 변하는 흐름이다.
내가 글을 쓸 때도 그 문장은 순수히 내 안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다. 독서와 대화 속 타인의 표현, 사회·문화가 만든 언어 습관, 몸의 무의식적 감각들이 뒤얽혀 흘러든 결과다. 그래서 내가 이 문장을 썼다는 말보다, 기호의 조각들을 맞물려 꿰맨다는 말이 본질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정체성은 이어진다. 의식이 느슨한 끈을 쥐고 나를 꿰어 주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변화의 물결을 응시한 타자의 응답이 내가 여기 있음을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말을 걸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조차 확신하기 어렵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거울이 아니라 타자의 호명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예전 별명으로 나를 부르는 순간, 나는 잠시 그 시절의 나와 이어진다. 한밤중, 잊고 있던 번호로부터 “잘 지내?”라는 메시지가 도착한다. 짧은 세 글자가 오늘을 어제와 꿰맨다. 내가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다.
윤리는 사소한 비대칭들이 하루의 해짐을 꿰매는 방식으로 온다. 엘리베이터 문턱에서 잠깐 멈추는 발끝, 차가 식지 않도록 내 쪽에 잠시 두는 잔. 긴 메시지 끝의 “답은 천천히”라는 문장, 숨이 가쁜 이 곁에서 박자를 낮추는 걸음들.
우리는 여전히 늦고, 종종 어긋난다. 그러나그 늦음의 가장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균형을 맞추지 못한 채 내 쪽으로 조금 더 기울여 보는 일, 그 불균형을 잠시 감내하는 쪽에서 하루는 다시 이어진다. 그렇게 시작된 작은 시작들이 저녁의 공기처럼 스며들어, 오래 꺼지지 않는 빛을 붙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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