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의 얼굴은 언제부터 정해져 있었을까
한때는 디즈니가 불편했다. 익숙하고 안전했던 원작의 인어공주. 붉은 머리칼과 백색 피부를 가진 그 이미지가 너무도 당연했기에,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의 캐스팅 소식은 낯설고 어색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처럼 의문을 품었다. 왜 굳이? 더 어울리는 배우를 썼다면 됐을 텐데.
논란은 예상보다 빠르게 번졌고, 그 중심에는 배우가 있었다. 그녀가 흑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공주와 어울리지 않는 외모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원작과 다른 피부색, 기준에 어긋난 외모. 공주에 어울리는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디즈니는 평판도, 흥행도, 주가도 잃은 듯 보였다.
이후 등장한 백설공주 실사화 역시 비슷한 분위기였다. 반응은 싸늘했고, 평론도 혹평 일색이었다. 이번엔 라틴계 배우 레이첼 지글러가 중심에 있었다. 여왕이 공주보다 더 예쁘다는 말이 평점 테러의 이유였다.
“여왕이 공주보다 훨씬 더 예쁨, 동심의 판타지를 깨버리는 디즈니.”
“여왕님께서 더 아름다우니, 굳이 공주를 찾을 필요가 없다.”
“3억 달러나 들여서, 대체 이런 영화를 왜 만들었나?”
나도 생각했다. 외모가 대중적인 배우를 기용했다면 어땠을까. 젠데이아나 나오미 스콧 같은 배우였다면 지금처럼 거센 저항은 없었고, 오히려 흥행했을지도 모른다. 취향을 거스르는 행보는 때로 오만처럼 보인다. 기업이라면, 대중이 원하는 걸 제공해야 한다. 억지로 씌운 교훈은 반감만 낳는다.
사실 디즈니의 시도는 누구나 예상하는 실패였다. 흥행도, 평가도, 여론도 불리하게 흐를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디즈니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왜, 굳이 반감을 살 수밖에 없는 쪽을 택했을까. 처음에는 단순히 돈이 많아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거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판단들조차 결국 내가 너무도 오랫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여온 이미지들, 그 익숙함 속에서 생긴 무의식의 프레임에 갇혀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디즈니가 뒤흔든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기준’ 그 자체였다. 공포와 불쾌감은 기준이 흔들릴 때 찾아온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믿었던 틀,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온 ‘정상’과 ‘아름다움’의 규범이 흔들리는 순간, 인간은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붉은 머리와 하얀 피부, 가느다란 허리와 맑은 목소리. 우리는 그것을 ‘공주’라고 불러왔고, 어느새 그것 외의 모습은 꿈꾸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듯했다.
꿈이 인어공주라고 말하는 흑인 여자아이 앞에서, 우리는 과연 “너는 인어공주가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혹은 당신의 아이가 누군가로부터 “넌 못생겨서 공주가 아니야”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 순간 가슴이 찢어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런 환경을 아무 의심 없이 물려주고 있다.
생명의 출발점은 같지 않지만, 그 불균형을 조금이라도 바로잡으려 애쓰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작은 균열의 불편함을 감내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더 넓은 꿈의 공간을 물려주기 위해서. 그 시도 끝에 지금 우리가 누리는 ‘당연한 권리’가 생겨난 것이다.
디즈니 역시 한때는 백설공주, 신데렐라, 오로라를 통해 수동적인 여성상을 반복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프레임을 스스로 부수기 시작했다. 흑인 신데렐라가 등장했고, 자기 서사를 가진 엘사가 노래했다. 그녀를 구한 것은 왕자가 아니라, 동생 안나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이후에는 백인의 틀을 벗은 모아나와 라야, 미라벨이 등장했다. 이제 공주는 새하얀 피부를 가질 필요가 없고, 누군가에게 구출당하지 않아도 된다. 사회가 정한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어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 그게 어째서 동심의 파괴인가. 오히려 디즈니는 동심이 가야 할 방향을 앞질러 걸었을 뿐이다.
너도 공주야. 어떤 피부색이든, 어떤 외모든, 어떤 배경이든. 세상의 시선에 너를 가두지 마. 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디즈니는 자신들이 쌓아온 오래된 신화를 스스로 흔들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따라올 저항과 불편함마저 감수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용기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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