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화를 멈출 수 없었다
사촌동생이 자신과 다른 아이를 “이상하다”고 말했을 때, 나는 정정하지 못했다. 세상은 그런 말을 정정하는 사람에게, 불필요한 손해를 감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상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를 더 낯선 위치에 세워버리는 일로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공동체의 질서에 의문을 던진다는 것은 불안을 감수해야 한다. 끝없는 추적 속에서 버텨야 하는 고통을 동반한다. 그무게를 어린 아이에게 지우는 게 옳은가? 그래서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지만, 아이의 말보다 나의 침묵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아마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다른 존재를 경계한다. 해석되지 않는 것은 언제나 두렵다. 그러나 일단 해석되는 순간, 대상은 우리의 예측 범위 안으로 들어온다. 만약 그와 다르게 행동하면,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있다. “이상해.” 타자화는 그렇게 뇌가 주체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내 세계가 흔들리지 않게, 내 자리가 위협받지 않게. 내가 발 딛고 선 세계를 부정하는 일에 대한 불안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된다. 이성이 편한 길을 택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고통받는 사람 옆에서 함께 울면, 내가 더 힘들다. 그러니 이성은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다. “피하라.”
사랑은 계약처럼 다루면 안전하다. 상대를 분석하고, 미리 의심하면 덜 다친다. 나는 합리적이고 옳은 길을 살아간다고 믿었지만, 동시에 공허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이 시기에 해석할 수 없는 감정과 현상들의 균열이 밀려왔다.
결정적인 것은 사람과의 만남. 그래서 철학과 문학을 붙잡았다. 왜 『이방인』의 뫼르소가 그렇게도 슬퍼 보였는지,『채식주의자』에 유독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지.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하고싶은 것과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된 것뿐이다.
아기가 울 때, 누군가는 달래주어야 하고 누군가는 그 이유를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혼자서는 맞출 수 없는 그 균형을 함께 맞추기위해 서로를 찾는다. 균형은 언제나 흔들리지만, 바로 그 불완전한 균형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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