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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꽃향기 Oct 10. 2024

트레이드 마크가 있습니다.

추억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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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대전화 번호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숫자가 있다.


1

7

7

5



무려 3년 동안 단짝이었던 친구가 알려준 숫자였다.











  대학 시절,  무선 호출기 일명 "삐삐"가 유행이었다.  작은 액정을 품고 있는, 대개는 네모반듯했던, 한 손에 딱 잡을 수 있는 크기의 신비로운 아이였다. 당시, 신세대의 필수품이었을 정도로 삐삐를 갖고 있지 않은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무선호출기 이미지

  



 집에서 친구의 연락을 기다리다 전화벨이  울리면, 빛의 속도로 집 전화기 앞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엄마가 먼저  전화를 받으시는 날에는 눈치를 살피며 소곤소곤 통화했었다.  그렇게 눈칫밥을 먹던 시기, 삐삐의 등장은 곧 신세계를 의미했다.



 친구가 호출을 하면  삐삐의 액정에 친구의 번호가 선명히 새겨진다.  나는 가족들의 눈을 피해  전화기를 방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이 전화기를 찾을 때까지 속닥속닥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전화비가 많이 나오는 달에는 심문 수사가 진행되기도 한다.

 누가 이렇게 전화를 많이 했어?

 나는 아닌데, 언니 아니야?

 웃기네. 너잖아!

심문 수사는 이렇다 할 결말 없이  종결되지만,  한동안은 눈치를 보며 전화기 사용을 줄여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에 굴복할 수 없었다.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우리는 기어코 그 뭔가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통화를  길게 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내 너를 생각하고 있단다.'

'내일 시험이다, 공부하고 있는 거지?'

'힘내자!'

'보고 싶어!'


 우리는 다양한 메시지를 암호로 만들어 냈다. 대개는 누군가가 먼저 만들어 낸 암호를 열심히 익혀서 사용했다. 그리고 마구마구 응용했다.


828282 : 빨리해라~ 늦지 마라~ 뭐 그런 의미?

2424244 : 으쌰 으쌰 으쌰쌰! 힘내라 힘!

486 : 사랑해♡

1010235 : 열열이 사모해요.

7942 : 친구 사이

797979 : 친구 친구 친구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내가 친구들과 애용하던 암호는 대략 이 정도였다.









  앞날이 창창했고 머리가 팍팍 돌아가던 그 시절, 우리의 암호 만들기는 나날이 업그레이드되었다.  누가 연락했는지 번호를 남기는 것보다 좀 더 참신한, 각자의 정체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그 어떤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이름의 이니셜"이었다.





 삐삐 액정에 표시되는 디지털 숫자는 꽤 매력적인 모양새였다.  뭔가 딱딱하지만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면 꽤 그럴듯하게 다른 형태의 문자로 보였다. 예를 들면 숫자  "5"는 영어 "S"로 숫자 "1"은 영어의 "I"로 보였다. 이러한 특징을 잘 살려 그럴듯하게 연결하면  대략 이름의  이니셜처럼 표현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영어 이니셜로 표시할 수 없는 이름이라면  숫자 읽기의 초성과 이름의 초성을 연결해서 암호를 만들어냈다. 때로는 운 좋게도 숫자 자체가 이름의 글자 하나하나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름이 영일이라면 "01"로 말이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친구들의 삐삐 액정에 당당하게 표시될 나의 이니셜 역시 결국 탄생하고야 말았다.






 1775 숫자 네 개는 무슨 글자의 이니셜이었을까?




삐삐 액정에 표시되는 1775는 대략 이런 모습이었다.





 내 이름의 이니셜, MS!


 게다가 누가 봐도 이건 MS,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것이었다. 사방팔방 사돈에 팔촌에게까지 널리 널리 알렸다. 그리고  여기저기 갖다 붙이며 사용했다.



17751004

100417751004

177579

17752424244

2441775244

1775486 친구이니셜

친구이니셜 4864861775



 난리가 난 것이다. 응용은 무궁무진했고,  서로의 이니셜을 삐삐 액정에 새기며  마음을 쌓아갔다. 우정의 꽃은 날로 날로 커져만 갔다.








또 생각나는 암호가 하나 있다.

"58" = 오빠

삐삐를 사용하던 시절 나의 유일한 오빠였던 사람에게 마구마구 보냈던 숫자.



 딸 부잣집 막내였던 나는  남자들이 참 불편했었다. 남자 선배들한테 "선배"를 그렇게 꼬박꼬박 붙였었다. 그러다 첫사랑 선배를 만났고, 조금 친해지게 되었다. 나는 욕심을 부렸다. 그리고 선배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당시 나 빼고는 모두들 선배를 오빠라고 불렀었다. 그래서 그 고개는 별 의미가 없었다.



허락을 받은 나는  선배의 삐삐 액정에  

 585858

 582424244

 17752424244

 5824241775

 마구마구 번호를 찍어드렸다. 그동안 오빠를 "오빠"라고 부르지 못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원 없이 오빠를 불러댔다. 물론 간간히 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녹음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삐삐에 오빠를 마르고 닳도록 새겼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좀 더 친해졌고, 영화도 보고, 데이트 비슷한 것도 몇 번 했었다. 그런데  흐지부지 지금으로 말하자면 썸만 타다 끝나 버렸다. 당시엔 너무너무 속상했다. 때로는 허공에 대고 모진 말도 해댔다. 하지만 지금 떠올려보니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이번 달 글벗들과 함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썼기 때문이다. 3주 동안 하루 5줄씩 이야기를 이어갔는데 너무 자세히 썼던 탓에 선배를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한 그즈음 열린 결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글벗들과 함께 쓰는 글은 마무리가 됐지만,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나의  첫사랑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 보려고 한다.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삐삐에 얽힌 추억까지 생각해 냈다. 삐삐의 수많은 암호들, 그 안에 담겨 오고 가던 아름다웠던 마음들, 그 추억을 다시 열어볼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



 대학 시절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치열했고, 앞날이 캄캄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서로를 생각했고, 서로를 아껴주었다. 우리들은 모두 참 아름다웠다.



 나에게 트레이드 마크를 새겨준  단짝 친구도,  나의 첫사랑 선배도 참 그리운 시간이다.



 고마워! 2024년의 6월!






 

 역시나 지난 6월, 블로그에 올렸던 글입니다. 조금 수정하여 "아주 조금 특별한 이야기"의 7화로 연재합니다.


 글벗들과 함께 썼던 '첫사랑 이야기'가 블로그를 통해 브런치 스토리의 한 회차의 글로 이어졌습니다. 저에겐 소중히,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부끄럽게도, 6월 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다짐했던 '첫사랑 이야기 이어가기'는 아직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올해 안에 시작은 해 보렵니다.  에피소드 형식이 될지, 조금 긴 글이 될지는 아직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 소중한 기억들을 찬찬히 꺼내보겠습니다.




"트레이드 마크가 있습니다"

역시나 저에겐 '아주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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