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석 선생님 / 심리학관
애착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아이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고 말았다.
눈길을 떼지 않고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에게 반응을 하려다 보니 지나치게 아이를 간섭하게 되고 말았다. 아이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방해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도 하고, 자기 스스로 소화할 수 있는 아픔도 달래주고 말았다. 걱정이 많은 부모들이 정도가 더 지나쳤겠지만 걱정이 많지 않은 부모라도 아이를 계속 주목하다보면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즘의 부모는 과거보다 더 바빠졌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바깥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아이에 대한 책임감은 높아졌고 아는 것은 많아졌다.
아이와 오래 같이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듯 보이면 (아이들은 원래 문제가 있다!) 애착이 제대로 안 되어서 이러는 것 아닐까 덜컥 겁이 나서 조금 더 걱정스런 눈으로 아이를 보게 되었다.
조금만 아파도, 조금만 힘들어 보여도
내가 해결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우리는 종종 잘해보려는 마음 때문에
가장 나쁜 선택을 한다.
그러려니, 하고 지켜봐야 가장 좋은 것인데
그러기 쉽지 않았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지나친 보호는 애착을 약화시킨다.
누군가 당신을 보호한다며 지나치게, 자주 선을 넘고 있다면 어떨까? 그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멀어지면 불안해져 돌아오지만, 돌아오면 불안해져 멀어지고 싶다. 아이 입장에선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한편으로는 돌봄을 갈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라고 싶다. 스스로 해내고 싶고, 스스로 자기를 달래고 싶다.
아이는 애기로 머물고 싶지 않다.
자라고 싶다.
그것은 유전적 본능이다. 살짝 울고 돌아가서 다시 해보면 좋을텐데, 부모의 품에서 계속 울고 달래져야 하는 아이는 자라지 못한다. 아이의 애착은 혼란에 빠진다. 그런 아이를 보며 불안해진 부모는 집착에 강도를 높이고 아이의 혼란은 그만큼 더 깊어진다.
열심히 해보려는 것이 상황을 망치는 것이 이런 일이다. 그냥 '어야, 그랬어', '에구구. 그래. 괜찮아.' 멀리서 이렇게 말해주거나, 다가오면 슬쩍 토닥여 주거나, 한번 웃어주거나 그 정도면 충분한데 지나치게 아이의 아픔에 공감한다.
사실 제대로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부모 자신이 아픈 것이다.
아이는 그 정도로 괴롭지도 않고,
도망치고 싶지도 않다.
아픈 것은 아이의 일상이고
성장의 불가피한 동반자다.
아이는 조금 상처받고 물러섰다
다시 앞으로 간다.
그걸 아이 몫으로 돌리며 기다려주지 못하는 것이 부모다. 아프지 않을 일에 아파하고, 상처 받지 않아야 할 일에 상처 받는다.
부모의 머릿속에 그려진 잘못된 그림 때문이다.
아이는 아프지 말아야 한다,
아이는 속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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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감각적으로 심각하게 예민한 아동, 유아기에 심각한 사건을 겪은 아동이라면 경우가 다릅니다.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물론 두 가지 경우라면 전문가가 개입해야 할 가능성이 높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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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 선생님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Facebook / 2024.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