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이 연애 시작도 하고 싶지 않았다.
32살에 이별을 하고 이제 선을 봐서라도 결혼이 가능한 사람을 만나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 28살의 남자가 고백을 해 온 것이다. 그것도 또다시 사내커플 이라니(나의 이전 연애도 사내커플이었다). 4년 정도 직장 동료로 서로를 봐 왔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연인으로써 상대방을 알아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여자 나이 32살은 결혼을 염두하고 만남을 시작해야 하지만 남자 나이 28살은 결혼과 상관없이 마음이 가는 사람과 얼마든지 교제할 수 있는 나이였다(최소한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가 내미는 손을 몇 쉽게 잡을 수 없었다. 마음이 끌리는 방향으로 가고 싶었지만 억지로 끊어내야 하는 것이 참 슬펐다. ‘참 슬펐다’가 아닌 좀 다른 표현으로 쓰고 싶지만 그 이상의 표현을 찾기 힘들 정도로 참 슬펐다.
“우리 왜 안 되는 건데요?”
“일단, 네 살이나 어린 남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이제 난 누구를 만나더라도 결혼을 먼저 염두하고 만나야 돼요. 그것도 엄청 큰 이유고. 전에 사내커플일 때 죽어도 다시는 같은 회사 사람 절대 만나지 말자 스스로 다짐했어요. 평범하게 연애하고 헤어졌는데 사라지지 않는 꼬리표가 붙어요. 그 어느 것 하나 내가 용기 내볼만한 계기가 없어요.”
“나이 차이는 문제 안 돼요. 나를 동생으로 생각해본 적 한 번이라도 있어요? 난 그냥 누나가 아니라 동등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그동안 먹은 밥공기 수를 세어봐도, 매년 먹은 떡국 그릇 수를 세어봐도 당신보다는 내가 더 많을걸요? 그리고 지금 당장 선 본다고 해서 바로 결혼할 수 있는 사람 만난다는 보장 있어요? 나랑 한 2년 정도 만나 보고 그때도 좋으면 그때 진지하게 결혼 생각해봐요. 그리고 사내연애 불편하면 그것도 비밀로 할게요. 비밀로 하면 만나다가 헤어져도 아무도 모를 거고, 만나다가 결혼하게 되면 그땐 아무 문제없을 거잖아요 그래도 안 될 이유 있어요?”
그래도 내게는 좋으면 바로 시작해 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예쁘고 한참 어린 나이인데 그때는 내가 나이가 너무 많은 여자라 선택의 폭이 좁다고 생각했다.
‘그냥 눈 딱 감고 한번 만나 볼까? 만났다가 아니면 빨리 헤어지면 되는 거잖아. 그래도 이건 아니지. 스물여덟 남자랑 서른두 살 여자가 말이 돼? 내가 고등학교 교복 입고 다닐 때 저 사람은 초등학생이었고, 내가 대학 신입생일 때 저 사람은 중학생이었다고... 근데 안 될 거 있나? 연상 연하 커플이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닐 것도 아닌데. 근데 회사는 또 어떻게 하고. 만났다가 헤어지면 회사 그만둘 거야? 비밀연애하다가 2년 후에 짜잔 우리 결혼합니다~ 이런 상황이 쉽게 올까?’
그를 만나면 안 되는 이유를 하루에도 몇 개씩 만들어 가며 더는 그에게 가지 못하도록 마음을 붙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 집요하게 내 손을 잡고 싶어 했다.
“나 소개팅 들어왔는데 해요? 말아요? 당신이 선택해요.”
그를 밀어내는 중에 회사 사람이 그에게 소개팅을 주선하고 싶다고 했다. 내 입에서 나가지 말라는 말이 나오길 기대했을 것이다.
“소개팅해요. 무조건 만나요. 가서 정말 좋은 사람 만날 수도 있잖아요. 최소한 새로운 사람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놓치지는 말아야죠.”
나는 소개팅할 때 가기 좋은 레스토랑과 칵테일바까지 검색해서 추천을 해주었다. 아무렇지 않아 보여야 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내보낸 소개팅에서 서로 괜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 내가 J 소개팅 주선한 거 알지? 서로 괜찮았나 보더라. 근데 J가 사귀자고 고백을 안 한다네. 여자애는 계속 고백 기다리고 있던데 왜 고백을 안 하지?”
주선자를 통해서 소개팅녀가 그의 고백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소개팅녀랑은 그냥 친구로 지낼까 합니다.”
“혹시 나 때문은 아니죠?”
“바보예요?”
“그분은 당신 고백만 기다리고 있는 거 같던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당신이 원하는 건 뭐예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거. 하라는 대로 해줄게요.”
“그냥 친구로 남아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줄 수 있어요?”
“해줄 순 있죠. 그런데 그게 되겠어요? 감기 걸려서 미친 듯이 기침이 나오는데 참을 수 있어요? 그거 참을 수 있다고 하면 해보죠.”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그 기침 참아 볼게요 나는.”
“그렇게 하세요 그럼. 그 선택에 대해서 절대 후회하지 마요.”
처음으로 그의 차가운 모습을 보았다. 후회하지 말라는 말이 무섭게 다가왔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네가 후회해도 그때는 상황을 되돌리지 않을 거라는 경고같이 느껴졌다. 시작도 해 보지 않고 끝내면 나중에 그 사람 만나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반드시 남을 것 같았다. 그렇게 후회하느니 차라리 만나보기라도 하고 후회든 실망이든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만나보고 후회되면 그때 헤어져도 늦지 않으니까. 지금 놓치면 잡고 싶을 땐 늦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남자를 다른 여자한테 뺏길 수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좀만 줄 수 있어요?”
“얼마나 필요한데요?”
“그냥 당신이 줄 수 있는 만큼.”
생각할 시간을 조금 달라고 했는데 어차피 그 대답 자체가 그에게도 나에게도 긍정의 신호인지라 대답이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만남이 시작됐다.
긴 시간 동료였고, 아주 짧게 사내 연애를 했고, 나의 퇴사와 동시에 정말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