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애는 순탄했다.
이것이 어른의 연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질투나 시기를 하지 않았으며 서로의 과거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나만 봐달라고 보채는 일도 없었으며, 회사 업무 때문에 약속에 차질이 생길 때도 서로 너그러웠다. 기념일을 챙기는 일에는 서로 무던했으며, 매주 주말은 별다른 약속 없이도 당연히 만나 데이트를 했다.
그는 나보다 어렸지만 어른스러웠으며, 친구들이 조선시대에서 왔냐고 놀릴 정도로 개방적인 여자를 싫어했다. 술을 좋아하는 여자를 싫어했고, 담배 피우는 여자를 싫어했고, 입이 거친 여자를 싫어했으며, 잘 노는 여자를 싫어했다. 그리고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여자가 나였다.
술은 거의 입에 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회식자리에서 술을 강요당하면 퇴사를 감행할 정도로 술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술자리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가능하면 12시 전에는 집에 들어갔고, 흡연을 해 본 적도 없었다. 학창 시절부터 욕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으며, 음주가무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유흥을 좋아하기엔 늘 맨 정신이었고, 기본적으로 내게는 ‘흥’이 없었다.
그 역시 담배는 피우지 않았고, 술은 적당히만 즐겼다. 입에 발린 말은 못 하는 성격이라 나를 가끔 서운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만큼 진심만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할 줄 아는 남자였다. 특별한 이벤트를 하는 로맨틱함은 없었지만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노래를 잘해서 통화 중에 감미로운 사랑 노래 정도는 서슴지 않고 불러주는 남자였다.
나는 말이 많은 여자였고, 그는 말이 없는 남자였다. 서로 상호 보완이 잘 되었기에 3년 넘게 만나는 동안 한 번도 싸움을 한 적이 없었다. 서로에게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싸움이 없던 비결이기도 했다.
“결혼 생각이 있으면 차를 팔아야 될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모아야 되는데 차에 지출되는 비용이 너무 큰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자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차도 팔았다. 차가 있을 때는 헤어질 때마다 항상 집 앞까지 나를 바래다주었지만 차를 팔고 난 후에는 신도림역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그래도 딱히 불편함이 없었다. 각자 집이 서울과 인천이었지만 지하철 급행 덕분에 만남에 있어 소요되는 시간은 1시간 이내였고, 가고 싶은 곳 어디든 대중교통으로 충분히 이동할 수 있었다. 둘 다 직장이 서울이었기 때문에 주중에는 서울에서 만나서 신도림역에서 헤어졌고, 주말에는 그가 인천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을 대하는 태도도 비슷해서 시간 약속을 하면 서로 늦는 법이 없어서 그로 인해 기다림에 지쳐 싸우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단단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결정적으로 결혼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어려운 시작이었지만 이 사람이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헤어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린 남자 만나면서 얼마나 오래 만날까 싶었다. 그런데 만나는 동안에 우리는 헤어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마음속 한구석에는 ‘2년 정도 만나보고 그때도 좋으면 그때 진지하게 결혼 생각해봐요. ’라는 그의 말이 한 번씩 떠올랐지만, 그가 얘기한 2년이라는 시간도 훌쩍 지나 있었다.
만나면 좋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하루하루 나이를 더 먹었고 그가 31살이 되는 동안 나는 35살이 되어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하지 않으면 36살에도, 37살에도, 그리고 38살에도 똑같을 거 라는걸 알았다.
안 되면 되게 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더 노력해보고 그래도 불가능하면 그때 포기해도 되는데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답이 안 나올 걸 알아서인지 용기조차 내지 않는 그가 한 번씩 원망스럽긴 했다.
“자기는 시간이 상관없다고 했지만, 난 아니에요. 우리 집에서는 남자 친구도 없는 줄 아니까 자꾸 선 보라고 하는데 내년이면 이제 그 선 자리마저 없을 거 같아요. 정말 나랑 결혼할 생각 있으면 이번 추석에 우리 집에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가요. 그리고 그전에 당신 아버님께 먼저 인사드리러 가요. 내가 줄 수 있는 시간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이것도 아니면 그냥 우린 아닌 거라고 생각할게요.”
추석이 한 달 정도 남은 어느 날 그에게 마지막 통보를 했다. 모 아니면 도. 이제 결혼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이별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어떤 선택을 할지 나도 알 수 없었다.
하루 이틀 시간은 흐르는데 딱히 우리의 관계에 변화는 없어 보였다. 내년에는 결혼을 하려나? 하는 생각보다 곧 이별하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그를 보채지 않았고, 조급해하지 않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주었으니 그 시간은 온전히 그의 시간이었다. 생각도, 판단도, 결정도 그의 몫이었다.
잠수 이별을 생각했다. 그의 답이 아니라고 하면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었다. 이별의 말 따위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야. 그래서 아주 고통스럽게 이별할 거야. 그런데 그렇게 헤어지면 고통스럽긴 할까? 힘들긴 할까? 혹시 나만 힘든 건 아닐까?’
시간이 갈수록 5(결혼):5(이별)에서 4(결혼):6(이별)...... 2(결혼):8(이별)의 확률로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거야. 빨리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이번 주말에 우리 아버지랑 같이 밥 먹어요.”
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 그가 말했다.
‘...... 나도 이제 시집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