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처럼 집에서 책을 읽던 와중에 대뜸 걸려온 낮선 번호의 전화.
"서울 대검찰청 수사관 000입니다. -씨 맞으십니까?"
왠 여자의 말로는 성매매 업자가 체포되는 과정에서 내 명의로 된 통장이 나왔단다. 그래서 나도 불법자금 은닉 및 세탁 혐의라고, 구속영장이 발부되어있다나.
이렇게 글을 쓰는 나도 '어떻게 저런걸 속냐' 싶은데, 당시의 그 상황에, 갑자기 머리를 몇 대는 손찌검 당하는 듯한 혼란에 아주 깔끔하게 속아넘어갔고, 곧 전화를 바꾼 '자칭 검사'라는 남자는 도주가 우려되므로 그걸 방지하겠다며 핸드폰 화면 공유와 내가 보이는 전면 카메라를 켰다.
그 렌즈 앞에서, 내 이름과 생년월일 등 신상정보가 똑똑히 적혀있는 구속영장과 수사 서류에 겁먹은 나는 얼굴도 안보이는 검사님께 머리를 몇 번이고 조아리며 금융 거래 확인을 위해 보여달라는 계좌, 자산들을 모두 보여주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
그 과정에서 어쩌다보니 내가 보이스피싱을 당하고 있음을 눈치 챈 가족의 연락도 계속 왔지만 '엠바고'라며 사실이 새어나가는 순간 구속이 될 것이라 말한 보이스피싱범이 하라는 말만 듣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고 있던 나는 그걸 들을 정신도 없었고 보이스피싱범은 3500만원을 금세 쏙 빼먹고 날랐다.
뜬금없이 중단된 전화. [0원]이라는 숫자만 표시된 잔고. 그걸 보자마자, 몸이 바로 움직였다. 드라마같은데선 이렇게 당한 걸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넋이 나가곤 하던데, 난 그걸 보자마자 '당했다'는 생각과 동시에 몸이 집 밖으로 뛰쳐나가졌다.
전화 시작은 오후 3시. 그리고 내 돈을 쏙 빼먹고 날라버림과 동시에 내가 택시를 부르며 집에서 뛰쳐나간 건 오후 8시. 곧바로 가장 가까운 경찰서로 달려가봤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직을 서고 있는 몇몇 경찰관분들이 계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놈들을 바로 추적하고, 내 돈을 다시 돌려받을 순 없었다.
보이스피싱 전담팀 경찰분들은 이미 퇴근하신 후, 출근까진 한참 남았으며, 계좌 추적이니 뭐니 하는것도 일 할 사람이 없는 근무시간 이외엔 할 수 없는 판이니.
할 수 있는 건 사건 접수를 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끄적인 종이 한 장을 주머니에 쑤셔넣은 채로, 덩그러니 다시 돌아나와 집으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느새 바람이 차가웠다.
급하게 뛰어나오느라 주워입고 나온 후드집업과 집에서 입고 있던 작업용 츄리닝 차림으론 바람을 막을 수 없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틈새들을 찾아 비집고 들어왔다.
그럼에도, 더 차가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위를 피해 꽁꽁 싸매기보다는 그냥 이대로 얼어버리고 싶었다.
바람을 피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라도 맞고 있어야, 상황을 인지하고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머리통이 조금이라도 식어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초에 그런 것 따위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기도 하고.
참 돈 벌기 쉽다.
그럴듯하게 서류 몇 장 만들고, 겁을 주며 쪼아대니 3500만원이라니.
그놈들은 오늘도 한 건 했다고 회식이나 하려나.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사실까지 안 아버지와 동생이 급히 오고있다는 연락에 정리됐다며 사고날지도 모르니 천천히 오라고 답을 했다.
해결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사실을 안 것도 정리가 된 거긴 하니까.
문득 바로 전날 자기전에 본 영화 리뷰 영상이 생각난다.
캄보디아의 보이스 피싱 조직에 납치되어 강제로 보이스피싱 일을 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
그때 그 영화에서 피해자 가족은 어떻게 되었더라.
주인공은 피싱 조직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며 가벼운 처벌을 받고 수사팀으로 일하는 해피엔딩이었지만, 피싱을 당한 남자는 진작 죽었었고, 남자의 가족과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는 안나왔었지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