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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월 Dec 11. 2024

수확

단편 소설

 검던 하늘이 푸른 빛을 머금는 동틀 무렵. 해가 떠오르듯이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키고 나갈 채비를 한다.


 얼마 전 낫이 부러졌다.

 일 년 내내 밭을 일구고, 태풍 속에서 제발 작물이 견뎌내길 기도하며, 조금만 더 버티자고, 이제 곧 작물들이 다 자랄 것이라며 손톱이 깨어지고도 뜯어낸 나무껍질과 정체 모를 열매들을 주워 먹으며 버텨왔는데 하필 수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곧 큰 아이가 새 낫을 구해오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쩔 수 없지'라며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지금 내게도 이토록 탐스러운 곡식인데, 남의 것을 빼앗는 데 주저 없는 약탈자들에겐 또 얼마나 군침이 돌까. 그렇지 않아도 수확이 끝날 시기마다 더 극성이던 도적들이 올해는 수확이 끝나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겠는지 벌써 주변 마을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몇 개월 동안 아무리 굶주려서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꾸역꾸역 일어나서 수확을 해내야 한다. 지금 이대로라면 도적의 불길이 덮치고 나면 한 줌이나마 건지기도 어려울 것이다. 손으로 줄기를 잡고 억지로 뜯어낸다. 베어낼 수 있는 낫이 없으니, 손으로라도 뜯어야 한다. 굳은살이 잔뜩 잡히고 거친 손이지만, 그런 손도 줄기에 쓸리고, 가지에 긁히고, 피가 고인다. 쓰라린 고통에 손이 떨리며 신음이 새어 나오지만 참아야 한다. 대충 옷깃을 뜯어다 손을 감싸고 다시 다른 줄기를 뜯어낸다.


 지금 아무리 힘들고, 피로하고, 아프더라도 이는 굶주림만은 못하다. 아이들이 배가 고파 울어도 제대로 된 밥도 내어주지 못하고 제 어미가 다그쳤다가 미안함에 다시 보듬고 있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돌려지던 것보다 못하다. 함께 밭을 일구었던 청년이 몸져누워도 강에서 물을 길어와 몸을 헝겊으로 닦아주는 것밖에 못 하던 때의 무력함보다 못하다. 황망히 내일은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겠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씹을 거리가 생기겠지, 계속 버티고 버티다 보면 하루하루 살아남기만 하는 삶이 조금은, 나아지겠지 되뇌며 보이지 않는 희망을 억지로 붙잡고 있을 때의 간절함만은 못하다.


 당장 잡아 뜯는 풀포기가 다음 겨울을 버티게 해줄 것이다. 지금 참는 아픔이 나중의 고통을 미약하게나마 덜어줄 것이다. 지금의 괴로움이 하루라도 더 숨 쉴 수 있는 바람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손에 잡히지 않은 희망을 바라며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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