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적 시간. 감정으로 기억되는 시간.
오, 안녕하세요!
이게 얼마만이죠?
제 기억으론 14년 정도 되어가는 거 같은데
와.. 벌써 그렇게 됐나요?
진짜 오랜만이에요.
안 그래도 기회가 되면 한번 찾아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결혼식에서 뵙게 되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제가 여전히 그대로라고요?
맞아요, 어딜 가겠어요.
저야 늘 여전하죠.
근데 다른 사람들은 많이 놀란 표정이에요.
삐죽삐죽 짧았던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길러서
동글동글하게 말아 올리고
옅은 핑크색 아이섀도우랑 볼터치에.. 아!
인디핑크 레이스 원피스!
그렇게 복숭아 같이 꾸미고서
수줍게 웃던 여린 소녀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톤업 크림과 입술 색 틴트만 얹은 투명한 화장에
원피스 대신 정장을 입은
파란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다들 놀랄 만도 하죠.
근데 역시 저를 바로 알아보셨네요.
복숭아 닮은 핑크를 쫓아다니던 소녀는 사실,
하늘을 닮은 파란색을 더 좋아하는 아이였다는 걸
눈치채고 계셨던 거겠죠.
'넌 여전하구나.'
당신의 이 말이 계속 맴돌아요.
14년이라는 시간 동안
얼굴 한번 못 본채로 지내왔어도
이렇게 우연히 마주친 찰나의 순간 속에서,
세월에 변해버린 겉모습보다
변치 않는 속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준
깊고 깊은 마음을
그 짧은 한마디로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일까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시계 속 바늘이 아닌
감정이 흠뻑 묻은 기억으로 시간을 새기나 봐요
틈만 나면 402호에 모여서
한솥밥 먹으며 기타도 치고 보드게임도 하고
때론 진로에 대해, 세상에 대해,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에 대해
자기 일처럼 밤새 같이 고민해 주던 언니, 오빠들이
어느덧 누군가의 아내와 남편이 되어
한 가정을 이루고
자신을 쏙 빼닮은 꼬마들의 큰 우주로 서있는
후덕한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버렸지만
제 눈엔 여전히 싱그럽고 푸르렀던
20대의 그들로 보이는 것처럼요.
어디 그들뿐이게요?
방금 저랑 인사하던 저분도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아지셨지만
그 무더웠던 여름날,
시원한 계곡에서 물놀이하면서
맛있는 스테이크도 구워주시던 그때처럼
여전히 젊은 삼촌 같았는걸요.
어 잠깐..
지금 저 좀 이상한 거 같아요.
당신에게 이 모든 말들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제 얼굴이 달아오르고 뭉클해지죠?
우물 같은 당신의 두 눈을 마주하는 지금,
가슴 깊은 곳에서 굵직하고 진실된 무언가가
파도처럼 몰려오더니 누군가를 비춰주고 갔어요.
맞아요.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모른 채
한 번도 패이지 않은 복숭아 마냥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 핑크색 소녀를요.
그리고 지금 나를 바라보는
14년 전의 당신에게
소리 없는 뜨거운 아우성을 외치고 있어요.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고.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 굵직한 산들을 넘어서 여기까지 잘 살아왔다고.
제 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걸 보니
눈물이 순식간에 열매처럼
그렁그렁 맺혀있나 보네요.
하필 사랑의 서약을 하고 있는
저 부부를 향해
마음껏 축복해줘야 하는 이 타이밍에
저는 웃을 수도 없어요.
14년의 세월을 넘어
여전히 핑크색으로 풋풋하게 웃고 있는
여린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거든요.
안녕,
그동안 잘 지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