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동시에 비로소 부모님 품에서 독립한 나와는 달리, 동갑내기 남편은 대학생 시절부터 혼자 자취한 세월이 꽤 오래된 베테랑 1인 가구였다. 그래서 남편은 본인의 하루 일상루틴이 아주 확실한 사람이다.
하지만 식사시간이 불규칙하고 퇴근이 늦다 보니, 평소에 항상 끼니를 대충 챙겨 먹었다. 배만 채운다 식으로 남자치고는 적은 양을 먹고, 딱히 좋아하는 음식 취향이 있지도 않고, 요즘 sns에서 유명하다는 맛집들에도관심이없다.
며칠 내리 야근을 한 적에는맥도날드에서 드라이브스루로 불고기버거를 연속으로 똑같이 계속 사 먹길래, 왜 계속 그거만 먹냐는 내 질문에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는남편의 대답. 결국 내가 배민으로 밥과 짜글이 세트를 주문해 집으로 보내준 적도 있었다. 그래서 연애할 때남편은 '입이 짧고, 음식에 크게 관심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반면, 나는 맛있는 음식 먹는 걸 좋아한다. 많이 먹진 않지만, 나름 규칙적인 때에 식사를 챙기고 야식 및 간식은 거의 먹지 않는다. 네이버 지도에는 맛집과 카페 리스트가 6,000개 가까이 저장돼 있고, 어디 동네에 약속이 잡혔다면 그럼 ㅇㅇ맛집을 가봐야지! 하고 척척 제안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 신혼집 이사를 앞두고 결혼 준비를 하면서 나는 다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먹는 것 하나는 책임져주겠다고. 남편에게도 재차 당부했다. "일만 신경 써, 먹는 거랑 다른 부수적인 것들은 내가 알아서 다 잘 챙겨줄게."
자신만만한 나와 달리, 엄마는 농담조로 항상 나를 걱정했다. 쟤가 어디 나가서 살림이나 하고 살 수나 있을까...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부모님과 같이 살 땐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씻고 바로 방에 들어와 곧장 침대와 한 몸이 되어 핸드폰을 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어떨 땐 밥 먹고 소화시키기도 귀찮다며 저녁도 곧잘 거르곤 했다. 물론 침대에 계속 누워있는 채로.
한 번은 남편이랑 밤에 전화를 하는데, 자기는 지금 방 청소 중이라며 "해나는 집에서 청소 좀 해?"라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는데 거기다 대고 "응. 방바닥에 머리카락 잘 줍지"라고 단호하게 말해서 깔끔한 성격의 남편이 살짝 걱정도 했더랬다. 내가 진짜로 떨어진 머리카락만 줍고 다니는 줄 알고...
아무튼. 그러던 내가 이제는 어엿하게 독립해 신혼집에 남편과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200% 달라진 모습으로 살고 있다.
(거의 다시 태어난 수준)
점심 무렵에 출근하는 남편보다 아침에 일찍 출근하는 나는 혹시나 내 알람소리에 잠귀 밝은 남편이 깨기라도 할까봐,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깬다. 30분 전에 일어나 핸드폰 한번 쳐다보고, 잠깐 눈 붙이고 15분 전에 일어나 다시 핸드폰 쳐다보고, 다시 밍기적거리다가 5분 전에 다시 한번 눈 떠서 핸드폰 시계를 확인한다. 그리고 발딱 일어나 기상...!
남편은 출근 전 아침은 본인이 알아서 챙겨 먹고, 직장에서는 도시락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퇴근 후 집에 와 밤 11시쯤 늦은 저녁을 먹는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그래서 나는 평일엔 매일의 남편 도시락과 저녁 메뉴를 미리미리 계획한다. 주말 중 하루 한 끼 정도는 외식을 하기에, 주말 중 두 번의 끼니와 간식 메뉴 정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 끼니 대부분은 우리 쿠킹스튜디오에서 해결한다. 요리수업 후 나온 음식들, 주문이 들어와 준비하고 포장 후 남은 음식들, 수업 후 남은 냉장고 식재료들 등등. 나와의 카톡 창에는
월요일 도시락메뉴, 월요일 저녁메뉴
화요일 도시락메뉴, 화요일 저녁메뉴
수요일 도시락메뉴, 수요일 저녁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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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냉장고 상황과 우리 수업 메뉴들을 바탕으로 계획이 짜여져 있다. 되도록 메뉴가 1일 이상 겹치지 않게, 똑같은 음식을 연거푸 먹게끔 하지 않도록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우리가 꽃게탕 수업을 한 날이면, 남편도 그날 밤에 집에 와서 꽃게탕으로 저녁을 먹는다. 프랑스가정식 수업을 했으면 엄마아빠가 드실 것, 우리 부부가 먹을 것 사이좋게 나눠서 집에 가져온다. 향신료 강한 아시안푸드 수업을 한 날이면 혹시 모르니 조금만 가져간다고 엄마한테 말한다. 그날 (토종 한식파) 남편에게 먹여보고 엄마에게 피드백. "안 먹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먹었어", "역시 짐작한 대로 코코넛 향이 세서 못 먹겠다길래, 내가 다 먹었어."
남편이 퇴근한다고 전화를 하면, 집에 올 시간 맞춰서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하는데, 주전부리 하나를 담아도 접시에 담는다. 남은 배달음식이나 포장해 온 간이음식을 데워 먹더라도 그릇에 옮겨서 세팅한다. 집에 와서 씻고 먹을 것인가, 먹고 씻을 것인가에 따라 음식 세팅도 단계가 있다. 씻고 나오면 머리도 말릴 테고, 옷도 갈아입고, 주방이랑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수다도 떨 것이고... 따뜻할 때 먹어야 되는데, 괜스레 딴짓하다가 음식이 식기라도 할까봐 노심초사.
이런 게 다 엄마의 마음일까. 사실 다 엄마가 하던 걸 어깨너머 보고 자라며 배운 것인데.
원래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항상 가족들의 끼니를 손수 정성껏 차리셨다. 느긋한 주말 아침이면 온갖 빵에 달걀요리, 샐러드, 소시지와 햄, 치즈 등이 올라가 브런치가게 뺨치는 한 상이 차려졌다. 유치원생일 때 집에서 바이올린과 영어레슨을 할 때면 선생님 드실 주스와 다과도 항상 준비하셨고, 우리 남매가 수험생일 땐 매 끼니와 간식, 야식까지 따로따로 준비해 방 안에 넣어주셨다. 손님들이 오실 땐 파운드케이크와 쿠키를 굽느라 집 안에는 버터 향이 가득했고, 아빠의 직장 동료분들이 날 잡고 놀러 오실 땐 주방에서 거실 끝까지 뷔페가 차려져서 사람들 입을 떡하니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 당시에 유튜브가 있었다면, 아마 우리 엄마는 유튜브 브이로그로 큰 광고수익을 벌었을지도 모르겠다.
음식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살림살이도 마찬가지. '휴지나 칫솔, 치약도 돈 주고 사는 거구나' 바보 같은 소리지만 나도 독립해 나와 살아보니,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새삼 깨달았다. 항상 집에 있어야 하는 휴지, 칫솔, 치약은 재고가 넉넉한지 다용도실을 체크하고, 없으면 쿠팡을 켠다. 남편 칫솔이 다 뭉개져 형태가 망가져 있으면 새 칫솔로 바꿔놓고, 샴푸 통이 비었으면 새 샴푸로 바꿔 놓는다. 변기 옆 두루마리 휴지가 한 두장 간당간당 남았으면, 혹시나 당황스러운 일 없도록 새 휴지를 변기 위에 올려놓는다. 아침에 남편이 들고 나가기 편하도록 도시락 가방, 텀블러 등을 한쪽에 잘 보이도록 배치해 두고, 아침에 시간이 여유롭게 남으면 빈속에 출근하지 않도록 아침상도 간단히 차린다.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이디야 홍시주스가 먹고 싶다' 흘려 말하면, 기억하고 있다가 다음날 퇴근길에 홍시주스를 테이크아웃으로 사 와 냉장고에 넣어둔다.
엄마가 우리 가족에게 그러했듯, 나도 엄마에게 보고 배운 대로 남편에게 내조를 하려 노력한다.
일련의 노력들이 빛을 발하는 걸까. 마냥 입 짧은 줄 알았던 남편은 이제 밤에 잠들기 직전까지 양치를 하지 않는다. 뭘 계속 찾아 먹는다. 밥 먹고, 과일 먹고, 간식 먹고 끊임없이 먹고 있다.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이 설렌다고 했다. 오늘 저녁은 뭘까, 기대하면서 온다고. 집에 들어서면 "오우, 이게 무슨 냄새야" 주방에서 분주한 나를 흘깃 쳐다보고 "빨리 씻어야지" 신나게 화장실로 들어간다. 뭘 차려놔도 맛있게 잘 먹어주니, 상 차리는 사람도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