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정보회사 회원이 될 뻔한 적이 있다. 결혼정보회사 초창기였던 오래전 그때는 남성 회원이 무척 귀해서 많은 남성들이 결혼정보회사에 가입을 해 달라는 부탁을 암암리에 받곤 했다. 비싼 회비도 면제고 엄청난 사은품까지 퍼준다는 말에 낚여서 엉겁결에 가입신청서를 쓰고 말았다.
취미랑 특기를 쓰란다. 난 그런 거 없는데. '없음-없음'이라 썼다. 전화가 와서 수정해 달란다. 난 누구랑 매칭되는 건 별로 관심 없었고 사은품 때문에 가입한 거라서 서류를 무성의하게 썼지만 그래도 없음-없음이라니 좀 그렇지? 혼자서 책 읽는 시간이 제일 편안하니까 독서라고 썼다. 근데 독서만 쓰자니 어쩐지 정적이기만 하네. 동적인 것도 넣자. 수영. 그렇게 '없음-없음'은 '독서-수영'으로 바뀌었다.
또 전화가 온다. 컨설턴트라는 직함의 그 직원이 말하길 독서는 너무 흔한 취미라서 임팩트가 없고 수영도 다른 걸 쓰는 게 좋겠다는 거다.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이 어떤 취미를 가졌냐는 건 상대의 경제력을 간접적으로 판단하는 단서가 됨을 감안해야 한단다. 그러면서 골프와 해외여행과 미식을 후보군으로 추천한다. 골프는 이날까지도 채 한 번 잡아 본 적 없고, 그땐 해외여행은커녕 외국 땅에 발 한 번 디뎌 본 적 없었고, 먹는 건 제일 좋아하는 게 녹차에 밥 말아서 마른 멸치랑 먹는 건데 무슨 놈의 얼어 죽을 미식이란 말이냐? 에잇! 사은품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웠다.
그러니까 컨설턴트의 말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있어 보이는 취미가 필요하다는 건데, 그때는 '있어빌리티'라는 말만 없었을 뿐 요즘 말로 하면 그게 바로 있어빌리티였다.
휴대폰이 울린다. 누군가 SNS에 새 게시물을 올렸다는 알림이다. 차의 운전석에서 테이크 아웃 커피잔을 든 손에 반 이상 가려졌지만 핸들에 살짝 드러난(드러낸) 외제차 문양이 보인다. 아침에 먹은 브런치 소개 같지만 그 옆에 세워 둔 가방이 핵심이다. 배추를 다듬는 손 사진으로 김장의 고됨을 호소하나 손목에 걸린 건 수백만 원의 스위스 시계다. 육아의 괴로움을 하소연하지만 유모차는 129년 전통의 독일 제품이다.
처음에 앱을 설치하고 계정을 만든 건 그때 그곳 사람들이 대부분 SNS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유로 그걸 권유받아서였지만, 서로 엿보고 서로 동경하고 서로 질투하고 서로 경쟁심을 느끼는 분위기에 피로감을 느껴 얼마 못 가서 계정을 삭제했다. 바로 다음 날, 누가 무슨 일 있냐고 묻는다. 아무 일도 없는데. 에이, 무슨 일 있죠? 아니 정말 아무 일도 없고 그냥 재미가 없어서. 그랬더니 나를 걱정한다.
사람들하고 좀 어울리고 소통도 해야지 왜 그렇게 살아요.
조용히 내 방식대로 사는 건 '그렇게'로 축약될 만큼 무가치한 거구나.
시계를 거꾸로 돌려 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보인다. 어느 시대든 고유의 강박이 있고, 강박에도 트렌드가 있다. 어느 시대는 충효와 정절에 대한 강박, 어느 시대는 신앙과 영성에 대한 강박, 어느 시대에는 자본가 계급을 타파하고 모두가 평등한 지상낙원을 만들자는 강박, 또 어느 시대는 빨갱이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강박...
그리고 이젠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나 엄청 행복하다고 남들에게 끊임없이 인증하고 동의받아야 한다. 실제 모습이 어떻든 남들에게는 모든 순간 행복하게 보여야 한다. 쉴 새 없이 행복한 삶을 전시하고 증명하고 동의받을 것! 다른 것들은 철저히 은폐할 것! 그것이 세상의 명령이다.
있어빌리티는 이 행복 강박의 시대가 낳은 사생아다. 있어빌리티의 본질은 있어 보이기를 좋아하는 것이기 이전에 없어 보이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니, 있어 보이게 연출하는 건 곧 현실을 도려내는 작업이다. 그 작업으로 뭔가 탄생하면 사람들은 댓글을 쓰고 ‘좋아요’를 누르며 호응해 주고는 나만 빼고 다 행복해 보여서 박탈감과 자괴감에 빠져든다. 분하다. 기필코 복수하고 말겠다. 내가 만족하려면 남들의 눈에 보이는 내가 만족스러워야 한다. 그렇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나는 행복하고 싶다. 글을 쓰는 이 순간도 행복하고 싶다. 하지만 삶의 목표가 행복은 아니다. 건빵 봉지 속의 별사탕처럼 존재하는 행복의 순간들을 가지고 전체 삶을 살아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내게 누가 삶의 목적을 묻는다면 내 대답은 그저 삶일 뿐이다. 이게 무슨 깊은 성찰이나 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행복에 집착하면 할수록 현실을 더욱더 불행하게 인식할 게 난 두려울 뿐이다.
시대마다 있는 강박의 진짜 문제는, 그 강박이 그 시대 개개인에게 사실상 강요되는 것이다. 모든 게 좋고 언제나 행복하다고 외쳐야 하는 긍정 과잉의 세상에선 그 대세에 합류하지 않은 이들은 실패자처럼 되어 버린다. 타인의 불행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 세상으로 빠르게 이행한다. 그러니깐 우울함은 감추고 슬픔은 억눌러야 한다.
매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은 어떤 이에겐 안 맞는 옷과도 같아서 삶을 뒤틀린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활력과 긍정이 넘쳐흐르는 상태보단 고요한 가라앉음 속에서 더 편안한 사람도 있다. 심지어 사서 고생하며 뭔가를 찾아 치열하게 헤매는 삶을 택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삶에서 추구하는 방향성이 아예 다르니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말든 그런 이들을 두고 "저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살지?"가 궁금할 까닭은 없는데. 이 좋은 라이프 스타일을 혼자만 알고 죽자니 통분하여 참을 도리가 없는 것일까?
처음에 SNS 계정을 없앴을 때 한편으론 사람들과 교류가 차단되고 무인도에 갇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지내보니 기우였다. 무의미한 인맥은 저절로 정리되었고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의미 없는 인맥이 없어진 빈자리는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사소하지만 예쁜, 사소하지만 감사한,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들을 찾아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소중한 건 막상 없어 봐야 그 필요함을 느낀다고 하는데, 필요 없는 것도 막상 없어 봐야 그 불필요함을 알게 되나 보다.
교류를 안 하니 역설적으로 교류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명과 암을 보지 못하고 보정되고 편집된 가상 인간을 만나면서 그 스침을 교류라고 착각해 온 건 아니었는지. 그런 관계를 친구라 생각하며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한다고 자기만족을 해 온 건 아니었는지.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알게 되었다. 다른 곳에선 뭔가 보정을 해 가며 너도나도 나는 이렇게 행복한 사람이라 외치고 싶어하는 느낌이라면 브런치에서는 저마다 안에 있는 걸 끄집어내는 느낌이랄까. 어질어질한 자기 PR 시대 말고 자기 고백 시대를 꿈꾸는데, 그런 시대는 나중에라도 올 일이 없을까.
이제 나는 내 행복을 온라인으로 들고 가서 박제할 아무런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저 선물처럼 찾아오는 시간에 갓 구워 열기를 품은 베이글 한 조각과 커피 두 잔을 놓고 사랑하는 사람과 그 순간을 즐기면 더없이 만족한다. 그런 시간은 남들 앞에서 SNS로 박제되지 않아서 어쩌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생기더라도 흘려보내기 쉬울 테니까.
어떻게 살아도 어차피 삶의 대부분은 화려함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지게 되어 있다면, 그대로 놓아두고 싶다. 다른 게 자리한 곳을 화려함으로 덧칠하려고 하지 않고, 타인의 욕망이 내 안에 자리잡지 않게 하고 싶다. 그 능력을 '없어빌리티'라고 한다면, 그건 행복 강박의 어지러운 세상으로부터 내 삶을 지켜낼 힘이다.
없어빌리티. 입술 사이로 새는 바람이 후련하고 가볍다. 있어빌리티를 말할 때의 바람과는 사뭇 다른, 더 바람 같은 바람이다.
그 바람으로 내 빈 곳을 채워 본다.
10번 중에 6~7번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10번 중에 10번 행복하려 한다면 그건 강박증이다.
- 김수현,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