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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May 09. 2024

길에서 주웠어요. 주인을 찾아주세요

<한 짝_ 최정례>

길에서 만 원을 주웠다. 그땐 만 원은 작은 돈이 아니었다. 이게 웬 떡이냐. 냉큼 주워서 동네 정육점에 갔다. 불고기를 사 왔다.


신나게 불고기를 굽고 있으니 아버지께서 물으신다. 무슨 돈으로 고기를 샀냐고. 어, 길에서 만 원을 주워서 그걸로 샀다고 그랬다가 천지가 개벽하도록 혼났다. 그러면 경찰서에 맡겨야 한다나? 하지만 불고기는 이미 사 왔는데 어쩐담. 굽다 만 불고기를 프라이팬에 담긴 채로 경찰서에 가져갔다.


길에서 주웠어요. 주인을 찾아주세요.


그랬더니 직원이 말한다. 아마도 형사님이셨겠지. 불고기를 길에 떨어뜨리고 다니는 사람도 있나? 경찰 30년에 처음 보는 일이다...

나의 분실물 습득 흑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슈퍼마켓에서 물건값을 치르다가 천 원을 잃어버리고도 15분 정도 되는 동선을 역으로 따라가서 계산대 근처에 떨어진 천 원을 기어이 찾아내시던 기억이 있는데(※당시 천 원이면 짬뽕이 한 그릇이고, 오락실에서 하루종일 놀 수 있었다), 만 원을 잃어버린 그분도 자기 동선을 역으로 따라가며 찾으려고 하시진 않았을까? 그런다고 꼭 찾는다는 보장은 없겠지만, 나는 그 가능성을 아예 제로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약 20년 후. 이번에는 지갑을 주웠다. 현금은 하나도 없었고, 다행히 지갑 주인의 신분과 연락처를 확인할 수 있어서 연락을 취해서 만나 건네드렸다.


그런데 그분의 표정이 밝지가 않았다. 여기 현금 있지 않았느냐고 물으시길래 없었다고 말씀드리니, 그분은 말없이 내 손에서 지갑을 낚아채듯 건네받고 갈 길을 가셨다. 아마도 그 지갑을 나보다 먼저 주운 누군가가 현금을 가져간 후 지갑은 도로 버렸고, 그분은 현금을 가져간 게 나라고 짐작하신 게 아닐까?




몇 년 더 지난 어느 날. 어떤 건물의 화장실에서 또 지갑을 발견했다(이 일은 예전의 글에 쓴 적이 있다). 이번에는 지갑 속을 보지 않고 그대로 우체통에 넣었다. 내 행동이 전보다는 조금 진화한 셈이다.


그런데 열흘쯤 지나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더니, 지갑 분실 신고가 접수됐고 CCTV 확인 결과 최초 발견자가 나라는 것이다. 그 지갑엔 신분증이 없었는지 주인은 결국 지갑을 찾지 못했고 나는 그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지갑 주인은 비싼 외국산 지갑이라는 이유로 적지 않은 합의금을 요구했고 나는 전과자가 되기 싫으면 사비를 털어야 하게 되었다. 이 기분을 누가 알까? 이 일은 지금도 내 삶에서 기억하기 싫은 대표적 사건들 중 하나이다.


이때 몇 가지를 새로 알게 되었다. '점유이탈물횡령죄'라는 게 있다는 것도. 좋은 마음으로 물건 찾는 데 도움을 주려고 했다가 까딱 잘못되면 큰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것도. 잃어버린 물건을 보면 손대지 말고 못 본 척 지나치는 게 좋다는 것도.




나는 물건을 곧잘 잃어버린다. 가장 많이 잃어버린 게 우산, 그다음이 장갑이다. 우산은 그래도 좀 나은데, 장갑을 잃어버리면 그렇게 속이 상할 수가 없다. 특별한 의미가 없는 장갑이라도 마음이 쓰리다. 짝을 잃고 그 자신도 존재 의미를 잃은 나머지 한 짝이 슬퍼서일까. 실제로 양쪽을 함께 잃어버렸을 때가 차라리 나았던 걸 생각하면 일리는 있다.


추운 겨울에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장갑 한쪽을 보면 장갑 주인의 마음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장갑을 잃어버린 사람한테 "어디서 잃어버렸어?" 이러지만 않길 바랄 뿐이다. 그걸 알면 찾았게?

확실히 장갑은 꽤나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이다. 최소한 불고기보다는.

2024년 1월 6일. 그날 밤은 함박눈이 소복소복 쏟아지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집 앞 길가.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뭔가 검고 작은 물체가 눈 속에서 흐릿하게 윤곽을 드러낼 듯 말 듯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쌓인 눈을 걷어내 보았다.


장갑이었다.


이 장갑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어쩌면 이것을 찾으려 할지도 모른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 상황에서 오지랖을 부리면 안된다는 걸 오랜 학습으로 안다. 그저 주인이 발견할 가능성을 약간이라도 높여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주인 잃은 장갑을 보며, '잃어버림'을 사색한다.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세월.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일상. 잃어버린 건강. 잃어버린 기억. 잃어버린... 잃어버린... 그래, 우린 늘 뭔가를 잃어버리며 살지. 어쩌면 삶 전체가 뭔가를 계속 잃어버리고 또 잃어버리는 과정인지도 몰라.


매일 밤 사람의 기억은 어떤 것은 장기 기억 저장소로 옮겨지고 어떤 것은 심연으로 옮겨져 가라앉는다. 어떤 기억이 또렷하지 않고 잡힐락 말락 하는 건 장기 기억 저장소가 아닌 심연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눈 속에 묻힌 이 장갑처럼.


눈은 계속 내린다. 나는 장갑을 눈 속에서 꺼내 들었다. 물기를 툭툭 털어내고 하얀 눈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장갑 주인은 어쩌면 나중에 여기를 지나갈지 모른다. 그렇다면 발견할 수 있으리라. 그전에 장갑이 눈 속에 깊이 묻히지 않는다면.


장갑 한 짝을 잃어버렸다. 용산역에서 돌아오는 기차표를 예매하느라 장갑을 벗었었다. 커피를 주문하느라 카드를 꺼냈었다. 개찰구로 나가기 전 십오 분간 서성이다 기차에 올라 자리를 찾아 앉아마자 장갑이 한 짝뿐이라는 걸 알았다. 기차가 막 달리기 시작한 때였다. 가방과 주머니를 뒤지는 동안 눈앞에서 간판들, 창문들, 지붕들, 헐벗은 가로수들이 달려 사라지고 있었다...


시인이 다른 것을 쳐다보던 그 짧은 순간에 '눈앞에서 간판들, 창문들, 지붕들, 헐벗은 가로수들이 달려 사라지고 있었'듯, 나도 어딘가에 신경 쓰는 사이에 등 뒤로 뭔가 휙 날아가 버리고 영영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똑같은 두 짝이 페어링된 장갑을 잃어버리는 일 없이, 새 장갑을 구하는 일이 없이. 내 삶에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심연에 빠뜨리지 말아야 할 가장 소중한 기억을 꼽는다면 그건 무엇이 될까.


다음날 아침. 장갑은 그 자리에 없었다.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을까.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갔을까. 그것까지는 몰라도 괜찮다. 장갑을 잃어버린 마음, 잃어버린 장갑을 본 마음. 두 마음을 모두 겪은 나의 마음은 그래도 하룻밤만큼은 자랐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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