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곰팡이를 더 잘 피우는 여자. 식물보다 날파리를 더 잘 키우는 여자. 내가 바로 살림 하수다. 비가 오는 날은 온몸이 몸살을 하므로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지만 음식 썩을 날은 모르는 여자. 이런 살림하수를 도와 매일 열심인 나의 주방 친구들이 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재료들과 대결하는 아씨를 몸이 부서져라 지원했던 친구들이 어느날......!
칼 부인 : 아씨도 서방도 나를 다룰 줄 몰라. 아씨는 칼만은 서방이 갈아주길 원했더랬지. 나는 늘 무뎠어. 고기를 썰때 나와 도마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몰라. 서로 죽일듯이 달려들어야 고기가 썰렸거든. 때로 양파도 가르기 힘들었어. 칼로서 자존감이 바닥이었지. 아씨는 어느날 결심했어. 숫돌에 나를 갈기로. 쓱싹쓱싹 숫돌에 갈리니 정말 시원하더라고. 내게 효자손은 숫돌이랄까. 아씨는 요즘 칼을 정말 잘 갈아. 시원시원하게 갈고 시원하게 고기를 썰어. 도마도 비명 지를 일이 줄었어. 칼을 가는 아씨는 좀 멋지기까지 해.
도마 총각 : 나는 원래 양면인데 지금은 한 면이야. 뒷면은 썩었어. 그런데도 아씨가 도마를 바꾸지를 않아. 압축 도마인데 벌써 11년째야. 가운데는 파여서 잘 썰어지지도 않는 걸 왜 안 바꾸는지 몰라. 그렇다고 햇볕에 잘 말려주는 것도 아니고. 날 애정하는 건지 미워하는 건지 모르겠어. 칼을 안 갈아서 쓸 때는 나를 죽일참인가 싶어. 아씨는 도통 햇빛을 집안일에 들일 줄 몰라. 이 집이 햇빛에 굶주린 건 알지만 아씨는 기우는 저녁 해를 어떻게 사용할지 때로 고민했던 사람인데 실행은 도통 할 줄 모른다니까. 아무튼 나는 좀 쉬고 싶어.
고무 장갑 할매 : 아씨는 나물 요리를 선망하지. 친정 엄마에게서 올라온 그 많은 상추를 해먹는데 일등공신은 나야. 오랫동안 몰랐던 사실, 고무장갑이 살림을 수월하게 한다는 거. 아씨도 그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렸어. 고무장갑만 있다면 설겆이도 나물 요리도 심리적 장벽이 없어진다는 걸. 나는 살림의 관문이야. 근데 아씨는 왜 나를 자주 썩게 하는 지 모르겠어.
냄비 도령 : 볶음이면 볶음, 국이면 국, 찜이면 찜 나야말로 만능이지. 나를 자주 새까맣게 태우고 표면을 안 씻어주는 건 불만이지만 나를 애정하는 것만은 분명해. 나를 잘 씻겨주는 건 아씨의 시아버님이나 친정어머니야. 언제 그분들이 오실지 기다리고 있어. 아씨께선 나를 목욕시킬 생각이 없거든. 겨울에 친정 어머니가 오시길 기다리는 편이 빠르다구. 아씨 뇌는 오염에 관대하고 몸이 편하도록 오랫동안 공들여온 듯해. 참 편리한 뇌야. 내 몸의 오물이 전혀 안 보이는 게 틀림없어.
국자 각시 : 냄비 도령, 나 없이 냄비가 다 무슨 소용이겠어. 아씨는 냄비 뚜껑을 열고 국자로 음식을 떠내는 순간을 가장 사랑해. 냄비가 중요한 게 아니야 국자가 중요하지. 국자 없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게 가당키나 해? 물론, 냄비 도령이 말한 아씨 뇌의 편리성은 공감해. 나도 깨끗하게 씻어주는 법이 없거든. 쓰고 나서 따뜻한 물에 휙 헹구면 끝이야. 손잡이 끝쪽의 오래된 오물은 닦을 생각을 안 해. 참으로 편리한 뇌야.
필러 할매: 아씨는 구황작물에 환장했어. 사시사철 감자 고구마를 곁에 두지. 싹이 나도록 두는 경우도 허다해서 남들이 나를 한 번 쓸 때 두 세번 쓰는 여자야. 불필요한 노동을 부른달까. 여행다닐 때 나를 가지고 다닐 정도로 아꼈어. 여행다닐 때 주 메뉴가 카레와 어제의 카레거든. 어제의 카레가 얼마나 맛이 없는지 모르고. 감자는 막 삶지 않으면 그 맛을 복원할 수 없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는지 어제의 카레는 혼자 먹더군. 아무도 먹지 않으니 별 수 없는 거지. 안타까운 아씨.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 없이 카레 없고, 카레 없인 아씨 육아 불가라는 거 알아줘.
선반 각시: 아씨는 어느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매달림이라고 나를 추켜세우던데, 내가 그 말에 감동 받아서 아직까지도 죽을둥살둥 매달려 있는 거잖아. 나를 얼마나 혹사시키는지 몰라. 아슬아슬 신기에 가깝게 그릇을 쌓는다고. 매일 묘기를 선보여. 나한테서 씽크대로 떨어져 저세상 간 애가 한 둘이 아니야. 그릇이 떨어질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몰라. 살림은 잘 못하는데 그릇을 왜 그렇게 무거운 걸까? 살림 못하는 아씨들 그릇이 꼭 크고 무거워요.
아씨 등장 : 얘들아. 오해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일리 있는 말이구나. 모두 새것으로 교체해버릴까 잠시 생각했다만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더 둘 생각이다. 어떤 날은 너희들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지만 너희들 없는 주방도 내 인생도 상상하기 쉽지 않다. 만날 너희들과 더 친해질 날을 기다려왔지만 그 날은 쉽게 오지 않을 성싶다. 오늘언 더더욱 멀어지고 싶구나. 그러니 잠시 입 다물고 쉬렴.
아래층 할머니의 음식물 쓰레기에선 봄냄새가 난다. 시장에서 갓 사온 이파리 채소들을 다듬어서 바로 쓰레기로 내놓는 것이다. 살림 고수들은 미루는 법이 없다. 그날의 재료를 구입해서 그날 손질을 마치고 저장까지 마무리한다. 그날의 음식물 쓰레기는 무르지 않고 단단하고, 썩지 않고 파릇하다.
나도 파릇하고 향긋한 음식물 쓰레기를 내놓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유통기한이 임박해서야 재료들을 구출하듯 요리를 한다. 나의 주방은 119 주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구조에 열심이다. 하수에겐 신선한 재료를 대하는 매일의 수고가 없다. 나는 언제쯤 봄내음이 나는 쓰레기를 배출할 수 있을까. 잘 버리는 게 최선인 하수의 생각보다 일보 전진해야 할 때인데, 나의 주방칠우들아 너희들이 봐도 글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