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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Apr 21. 2023

진격의 상추


엄마의 텃밭은 대단했다. 온갖 야채에 구황작물 심지어 수박, 참외 같은 과일까기 가리지 않고 생산했다. 사계절 내내 돌아가는 공장인가 싶을 정도로 70대의 농부는 열심이었고 생산량은 어마어마했다. 동생네 4인 가족, 부모님, 우리 집 5인 가족, 가끔 시댁에까지 이 농산물들이 배달되었다. 그중 제일은 상추였다. 이른 봄에는 여린 상추가, 초여름에는 크레놀린 스타일의 꽃상추가, 식물들도 죽지 못해 사는 한여름엔 녹지 않고 살아 남은 상추가, 가을에는 길고 단단한 상추가, 겨울에는 짧고 고불거리는 상추가 났다.


엄마가 3년 전 텃밭을 시작한 뒤로 이주일에 한 번은 엄마의 상추가 서해안고속도로를 질주해 서울로 진격했다. 상행하는 수많은 엄마표 상자들 중 단연 가장 많은 주행 거리를 달성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은 상추 때문이었다. 상추와 함께 온갖 음식들이 함께 배달되었지만 때때로 상추를 보내야 해서, 상추만 보낼 수 없어 김치를 담아 보내는 주객전도의 상자가 서울로 보내졌다. 상추는 엄마의 밭에서 엄마의 집으로, 아들의 집으로 서울 딸의 집으로 진격했다.


서울의 딸은 처음 상자를 받아들었을 땐 어릴 적 오리온 종합상자를 받았을 때 만큼이나 눈을 반짝이며 환호했다. 일이주에 한 번씩 오리라곤 생각 못했으므로 텐션은 최대치였다. 몇 달이 지나자 상자가 오면 텐션을 끓어올리는 데 노력이 필요했다. 엄마가 전화해서 "나 밭에 왔다"라고 말하면 입술이 긴장했다. 올 것은 오고야 만다. "상추 다 먹었냐?" "그럼 다 먹었지~~" 상추는 다음날 서해안을 달린다. "엄마 이번 상추는 어쩜 저번보다 더 맛있어" 상추맛은 매번 최고치를 갱신했다. 가능하냐, 이게. 그래도 다채롭게 갱신된 상추맛의 신기원은 어떻게든 목포로 발송된다.


이러다 텃밭 증후군이 생기는 거 아닐까? 시달린다, 분명. 이 증후군에 시달리면 "괜찮아"라던가 "아직 남았다"라던와 같은 사실을 기피하게 된다. 다 먹지 못한 상추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려 썩어서 새까만 물이 되고 범람해서야 버린다. 텃밭에서 난 재료가 남아도는 마당에 어떻게 다른 식재료로 요리를 할 수가 있겠는가. 죄책감과 책임감이 용서치 않아. 요리를 기피한다. 이런 텃밭 증후군, 물론 행복한 증상이지만 그 죄책감은 보통 이상으로 괴롭다.


2년 넘도록 엄마와 나는 고되고 기쁜 상추길을 함께 걸었다. 우리는 텃밭과 함께 성장했다. 처음 엄마는 상추를 요리해서 보냈다. 된장 고추장에 초를 가미해 새콤 달콤 짭짜름한 상추 무침은 하루 이틀이면 동이 났다. 엄마도 상추의 성장속도를 감당 못하기 시작하자 날것 그대로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엄마는 상추를 요리하는 대신 요리 레시피를 전하거나, 오늘의 상추를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생생 리뷰를 전했다. "오늘 아침 상추에 된장 먹으니 다른 건 필요없다." 등등.


나도 화답했다. 내가 무친 상추 무침(나 혼자 먹는다.), 양념한 소고기를 바짝 구워서 상추 위에 올리고 발사믹과 올리브유로 드레싱하면 다 잘 먹는다. 상추와 무채, 계란 후라이 비빔밥도 좋다. 붉은 빛을 띄는 야채와 함께 샐러드로 먹기, 샌드위치에 넣어 먹기. 그래도 소진하기에 나는 역부족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딸의 상추 소진력이 둔화되는 바와 달리 엄마의 상추 영업력은 일취월장했다. 엄마는 사춘기를 맞은 조카 소식을 전하며 "상추를 며칠 막 먹였더니 여드름이 다 들어갔다"라고 전했다. 이 나이에도 호르몬이 왕성해서 뾰루지가가 있다. 당장 상추를 매끼니 챙겨 먹는다. 이제 상추씻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도 되었지만 여전히 가장 어려운 관문이다. 연일 샐러드로 미친 듯이 먹었다......만, 엄마 거짓말쟁이. 그래도 살은 좀 빠진 것 같다.


엄마와 나 사이엔 상추가 있다. 서로의 영업력이 일취월장하며 그 사이를 독려한다. 텃밭을 즐거워하고 농작물을 사랑하며 그 농작물을 먹으며 쑥쑥 크는 손자들이 기쁨인 엄마를 위해 영업하는 딸, 세 아이를 키우는 딸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텃밭을 영업하는 엄마. 만약 엄마가 이 글을 읽고 때때로 텃밭 증후권에 시달린 나를 알게 되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엄마, 농사 지을 때 비료가 필요하듯 글을 지을 때도 비료가 필요한 법이야. 엄마처럼 나도 농약은 안 쳐."라고 해야지.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 택배 갈 거다. 오늘 상추가 너무 맛있어서 고기 내놨다." 자, 다시 시작이다. 게다가 곧 5월이다. 크레놀린 상추가 진격할 테지. 소진의 기록은 계속되고 상추는 매일매일 그 전보다 맛있어지리라. 그보다 저번주에 온 쪽파 3킬로는 어떻게 소진해야 할까? 엄마 이제 쪽파 시즌은 끝난 거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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