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2021년 4월 30일

by msg

"시간은 두 장소 사이의 가장 먼 거리이다."

- 테네시 윌리엄스 (Tennessee Williams)



하윤이 먼저 여행을 제안한 건, 어느 맑은 평일 저녁이었다. 카페 창가 자리, 빛이 유리잔의 물결을 통과하며 테이블 위에 얇은 금빛을 깔아놓던 때였다.


그녀는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작은 숨을 내쉬었다.


“우리, 여행 갈래?” 현우는 책장을 천천히 덮었다.


“좋지. 어디로?”


“글쎄, 좀 찾아봐야지. 가까운 바다나 산도 좋고, 그냥… 떠나고 싶어. 그리고, 글 쓰면서 쉬고 싶어.”


마지막의 ‘글 쓰면서’라는 말이 현우의 귓가에 선명히 남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이미 여러 지도를 펼치고 있었다. 그날 밤 메신저 창은 지도 링크와 사진으로 한참을 반짝였다.


하윤: 강릉 어때? 기차 타고 갈 수 있어서 바닷가치고는 나름 가까워.


현우: 좋네. 새벽에 출발하면 일출에 하늘 색 바뀌는 것도 볼 수 있어.


하윤: 너무 일찍은 싫은데… 직장인에게 주말 오전은 너무 소중해.


현우: 그럼 11시 차 타고 가서, 시장에서 점심 먹자. 나머지 일정은 가고 싶은 곳 알려줘.


하윤: 오케이. 근데 글은… 여행 중에 쓰는 게 좋을까?


현우: 최소 메모. 그때의 냄새랑 분위기가 남아 있을 때.


하윤: ㅇㅋ.


‘ㅇㅋ.’ 짧은 응답이었지만, 현우는 그 속에 단단한 약속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첫 번째 여행, 강릉.


두 사람은 서울역에서 11시 기차에 올랐다. 부두에 도착하자 짭조름한 소금기가 피부에 먼저 내려앉았다.

하윤은 도착하자마자 카메라의 포로가 되었다. 그 사이 현우는 그 장면들을 눈으로, 때로는 노트에 새겼다.


‘부두 냄새—쇠와 젓갈 사이. 파도는 둔탁하게, 바람은 얇게.’


점심으로 회덮밥을 먹으면서도 셔터 소리는 이어졌다.


현우가 숟가락을 들다 말고 물었다. “오늘은 어떤 내용으로 글 쓸 거야?”


“응? 글쎄, 돌아가서 생각해봐야지.” 대답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돌아오는 열차에서 하윤은 사진을 고르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짧은 문장을 얹었다. #바다 #힐링.


며칠이 지나도 그녀의 글은 올라오지 않았다. 현우는 채근하지 않았다.

첫 여행이니까, 마음의 준비운동이 필요할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두 번째 여행, 경상도의 어느 시골 마을.


버스가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오를 때, 창밖은 분홍과 흰색의 물결이었다.


“여기는 그냥 걷기만 해도 좋다.” 하윤이 말했고, 그녀는 꽃비 속에서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글감이 좀 잡혔어?”


“응. 근데 밤에 집에 가면 너무 피곤해. 내일 아침에 쓸게.”


다음 날 아침에도, 그다음 날 아침에도, 그녀의 글은 올라오지 않았다.


세 번째 여행, 비 내리는 충청도의 도시.


카페 유리창으로 물길이 흘러내렸다. 하윤은 유리창 너머로 비를 찍었다. 저녁, 침대에 기대앉은 하윤이 노트를 펼치는 듯하더니 이내 접었다. 태블릿 갤러리를 넘기며 사진의 색 온도를 바꾸고 대비를 조절했다. 현우의 목구멍에 이미 작은 돌멩이 하나가 걸린 듯했다.


네 번째 여행, 전라도 어느 섬.


오후, 언덕 위의 카페. 통유리 너머로 바다가 펼쳐졌다.

현우가 먼저 침묵을 깼다. “하윤아.”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쯤 되면… 글 한 편, 써보자. 짧게라도.”


하윤은 컵받침을 손가락으로 빙글 돌리다가 멈췄다. 그리고 눈을 내리깐 채 웃었다. 묘하게 방어적인 웃음이었다. “그래 쓸거야야. 근데 지금은 그저 돌아다니면서 풍경을 더 보고 싶어.”


“우린 벌써 네 번이나 여행하는 동안 그저 풍경만 바라봤어.” 그의 목소리는 바늘처럼 가늘게 떨렸다.


“현우야, 여행은 즐기려고 하는 거잖아. 나는 주말에 이렇게 나와서 사진 찍고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 굳이 무언가를 해내지 않아도.”


“너, 여행작가 하고 싶다고 했잖아.” 짧은 정적 뒤, 그녀가 말했다.


“…너는 내가 글을 쓰지 않으면, 우리가 같이 있는 시간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해?”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었다.


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라고 말하려면, 목구멍에 걸린 돌멩이를 억지로 삼켜야 했다.


대신 컵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항구에 도착해 차에 올랐을 때, 라디오에서는 DJ가 청취자의 사연을 읽고 있었다.


일상의 공백을 메우는 따뜻한 이야기. 그러나 차 안의 공백은 따뜻하지 않았다.


결국 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윤아,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왜 글을 안 쓰는 거야?”


하윤은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눈꼬리를 스치며 반짝였다.

“현우야, 네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글이라면… 그게 어떻게 나를 위한 내 글이 되겠어?”


“내 기대 때문이 아니잖아. 네가 원했고, 네가 먼저 쓰고 싶다고 그랬잖아.”


“응. 근데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그냥… 숨 좀 쉬고 싶어.”


현우는 더 할 말이 많았지만 꾹 참고 한마디로 마무리했다. “그러자.”


말들은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좌석 사이에 내려앉았다. 유리창 바깥으로 고속도로의 흰 선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흘러갔다. 그 간격만큼 두 사람의 침묵도 일정했다.


다음 날, 현우는 하윤의 자취방을 찾았다. 여행의 피로가 남아 있던 월요일 저녁이었다.


“어제는 내가 미안.” 현우가 먼저 말했다. “마음이 급해서 좀… 몰아붙였어.”


“나도 미안.” 하윤이 짧게 웃었다.

“네가 나한테 기대하는 거 알아. 나도 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데…”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요즘은 그냥, 몇 마디를 쓰지 못하고 펜 앞에서 손이 얼어붙는 것 같아.”


“그럼 방법을 바꾸자. 그날 밤엔 딱 세 문장만. 냄새 하나, 소리 하나, 색 하나.”


“세 문장.” 그녀가 되뇌었다. “냄새, 소리, 색. 크크, 좀 오그라드네. 그래도 좋은 아이디어 같아.”


그 말이 자리 잡기 전, 하윤이 시선을 창으로 옮겼다가 다시 그에게로 돌렸다. 그리고는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근데… 그날 말이야. 주말에 마주쳤던 네 제자.”


“소정이?”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4월 18일. 그날 낮에 학교 근처에서 봤던 그 친구.”


그 날짜가 방 안 공기를 잠시 흔들었다.

“응. 점심 한번 먹었어. 오랜만이라서.”


“그 친구가 네 글을 기다린다고 했지?” 하윤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진 듯했다.


“맞아. 그냥 고맙다고, 앞으로 글 쓰고 싶다고 하더라고.”


“응.” 하윤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잠깐 초점을 잃었다가 돌아왔다. “그날 그 친구 표정이… 참 좋더라.”


“괜한 오해는 하지 마. 정말 그냥 제자야.”


“알아.” 대답은 빠르고 단정했다.


그러나 단정함은 종종 진심을 가린다. 하윤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냥…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졌어. 내가 여행작가 하고 싶다고 결심한 날, 너를 선명한 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사람을 보니까… 내가 더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그 솔직한 고백에, 현우는 목구멍을 막고 있던 돌멩이가 조금은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그는 그녀 불안의 근원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다르지. 넌 지금 다시 시작하는 거고, 그 친구는 이미 자신의 길을 정하고 달렸던 거고.”


“그런가.” 하윤은 웃는 듯 말하며 노트를 펼쳤다. “그럼, 오늘은 세 문장.” 하윤은 펜을 쥐었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지만, 이번엔 펜촉이 종이를 망설임 없이 눌렀다.


어제의 바다는 소금보다 쇠의 냄새가 더 강했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는 빗소리보다 더 멀리 갔다. 노을은 바다의 가장자리에 금박처럼 얇게 발려 있었다.


세 문장이 방 안에 놓였다. 공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현우는 안도와 미완이 뒤섞인 긴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하자.” 그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여행 끝날 때마다 딱 세 문장씩 쓰는 거야. 일주일에 한 편은, 그 문장들을 엮어서. 길지 않아도 돼.”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응. 다만, 내가 느리면… 기다려줘.”


“기다릴게.” 현우가 대답했다.

그 간단한 말 속에는 지난 몇 주간 쌓인 조급함을 꾹 눌러 담는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조급해지지 않게 조심할게.”


방 안에 조용한 웃음이 번졌다. 책상 위의 노트는 닫히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현우는 돌아가는 길에 그 노트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닫히지 않은 표지가 위태로운 약속처럼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휴대폰 화면이 반짝였다. 하윤이 보낸 문자였다.


'세 문장 정도는, 앞으로 계속 써볼게.'


그 짧은 문장이, 오늘 하루 내내 그의 목을 막고 있던 돌멩이를 한 알 만큼 가볍게 해주었다. 완전하지 않은 안도, 그러나 분명한 시작. 그는 화면을 닫고, 자기 발걸음의 리듬을 한 박자 늦췄다. 기다림은 종종 창작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면서도 오늘 다시 배웠다.


아직 어디까지가 시작이고 어디부터가 끝인지 모르는 이 여행의 한가운데서, 두 사람은 각자의 속도로, 같은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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