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 시작된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Pope John Paul II)
햇빛이 잔뜩 스며든 일요일 정오, 현우는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했다.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밝은 색 셔츠를 꺼내 입었다. 평소 같으면 원고 앞에서 시간을 보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 — 소정.
'선생님, 오늘 선생님네 학교 근처에 갈 일 있는데 밥 한 끼 사주실 수 있어요?'
하윤과의 관계 위에 내려앉은 무거운 공기 속에서, 그 메시지는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는 바람 같았다. 메마른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소정과의 인연은 6년 전, 현우가 스무 살이던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능을 1년 앞둔 고3, 그의 첫 제자였다. 짧은 글 속에서도 주제를 정확히 잡아내는 솜씨와 문장의 균형감이 좋았다. 현우가 하나를 가르치면, 소정의 다음 글에는 열의 세계가 담겨 돌아왔다. 그는 생각했다.
'얘는 글로 뭔가 해낼 수 있겠다.'
현우의 도움과 소정의 노력 덕에 그녀는 논술로 대학에 합격했고, 수능이 끝난 뒤에도 연락은 끊기지 않았다. 스승의 날, 명절, 짧은 안부 인사까지. 그 꾸준함에는 단순한 의례를 넘어선 진심이 담겨 있었다. 현우는 그 연락을 은근히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것은 지난 강사 생활이 헛되지 않았다는 보람의 증표이기도 했다.
학교 후문 근처 경양식집. 현우가 도착했을 때, 소정은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선생님!”
밝게 손을 흔드는 모습은 여전히 제자 같았지만, 스물다섯의 얼굴에는 한층 성숙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작년 가을 이후니까 거의 반년 만이죠?”
자리에 앉자마자 마주한 그녀의 눈빛은 반가움과 존경, 그리고 묘한 따뜻함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오므라이스를, 현우는 함박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지글지글, 철판 위에서 함박스테이크가 익어가는 고소한 소리와 냄새가 가게 안을 채웠다.
“사실… 제가 대학에 온 건 선생님 덕분이에요.”
“그건 네가 열심히 해서 간 거지.”
“아니에요. 논술 첨삭 해주시고, 글 보는 눈 길러주신 거… 그게 진짜 컸어요. 그때 국어 성적도 한참 올랐고요.”
현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소정은 식사 틈틈이 자신의 세계가 어떻게 넓어지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전공 수업에서 만든 단편 시나리오가 교수에게 호평받은 일, 동아리에서 촬영한 영상, 프리랜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소식까지.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현우는 잠시 잊고 있던 자신의 스무 살을 보았다.
“아직은 불안정하긴 해도 재미있어요. 언젠가 진짜 시나리오도 써보고 싶어요.” 현우가 웃었다.
“시나리오? 쉽지 않은 길인데.”
“그래서 선생님 따라가 보고 싶어요.” 그 말에 현우는 잠시 포크를 내려놓았다.
“나를 따라온다고?”
“네. 제가 처음 글이 재밌다고 느낀 건, 선생님이 제 글 칭찬해주셨을 때였어요. 그때 ‘아, 이게 내가 하고 싶은 거구나’ 확신했어요.”
식사가 끝날 무렵, 소정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선생님은 작가로서 목표가 뭐예요?”
잠시 생각하던 현우가 대답했다. “상업 영화 시나리오. 천만 관객, 아니 그 이상이 사랑하는 작품. 그 각본집을 내 손으로 들었을 때… 아마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일 거야.”
소정은 주먹을 살짝 쥐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작품 완성되면… 저한테 그 각본집 한 권 주세요.”
“왜?”
“책상 앞에 두고 매일 넘겨볼 거예요. 따라잡기 위해서. 아니, 언젠가 뛰어넘기 위해서요. 그리고 제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이 사람도 여기까지 왔다’는 걸 보고 다시 시작하려고요.”
그 진심 어린 선언에 현우는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소정은 단순히 글을 배우던 제자가 아니라, 그의 길을 함께 걷고자 하는 후배이자 그의 유산을 이어가고자 하는 존재였다.
가게 앞에서 작별하려던 순간, 맞은편 인도에서 하윤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고, 시선이 현우와 소정 사이를 오갔다. 현우는 하윤의 눈에 비친 풍경을 상상했다.
존경과 선망이 뒤섞인 눈으로 스승을 바라보는 젊은 후배와, 그런 후배를 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의 연인.
현우는 저도 모르게 소정과의 사이에 반 발짝 거리를 두었다. 따스했던 공기가 순간 차갑게 식었다.
소정이 먼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 선생님 제자예요. 한소정이라고 합니다.”
하윤은 애써 입가에 미소를 걸고 “아, 그래요? 반가워요.”라고 했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는 짧고 날카로운 의문이 스쳤다.
저녁, 하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의 침묵은 유난히 무거웠다. 라디오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공백을 어색하게 메웠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분, 제자 맞아?”
“응. 고3 때 가르쳤던 학생이야. 연락 끊기지 않고 종종 안부 묻는 애.”
일전에 해준 제자 이야기를 기억한 하윤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유일하게 연락 온다던? 근데 우리랑 나이 차가 얼마 안 나 보이네.”
“나 스무 살 때 첫 제자고 그때 고3이었으니 나랑 한 살, 자기랑 세 살 차이지.”
하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살 차이에도 여전히 깍듯하네?”
“쟤는 내 나이를 모르거든. 학원 애들은 내가 서른은 훌쩍 넘은 줄 알걸? 일할 때 나이 공개하는 게 별로 도움이 안 되더라고.”
“그건 맞지.”
짧은 대답 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팝송이 오히려 소음처럼 느껴졌다. 현우는 하윤의 침묵 속에서 그녀가 겪고 있을 폭풍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아까 마주친 제자의 반짝이는 눈동자. 한때 자신을 바라보던 하윤의 눈빛. 그 아이의 눈에는 지금 그녀가 잃어버린 빛이 있었다. 질문과 감탄으로 가득 찬, 의심 한 조각 없는 순수한 동경.
지금의 그녀는 어떤가. 회사 일에 지쳐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길을 잃은 채, 그에게 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하윤이 불쑥 손톱 끝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문득…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그 목소리엔 애써 감춘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뭔데?”
“여행작가. 여행 다니면서 글 쓰고 싶어.”
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갑자기?”
“응. 그냥… 내가 직접 보고 느끼는 걸 기록해보고 싶어. 교환학생 갔을 때도 그렇고, 같이 글 쓸 때도 여행 글이 제일 잘 나왔던 것 같아.”
현우는 그녀의 속내를 온전히 알지 못한 채, 그저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미소 지었다. “좋네. 그럼 같이 다니자.”
“정말?”
“응. 네가 글 쓸 수 있게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그 순간, 하윤의 얼굴에 오랜만에 진짜 활기가 번졌다. 현우는 그 표정을 오래 기억하기로 했다. 마치 길을 잃었던 사람이 마침내 지도를 찾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 미소가 둘 사이에 놓인 균열을 메울 새로운 시작의 신호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이 각자의 길을 향한 첫걸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차창 밖으로, 두 갈래 길이 잠시 나란히 달리다 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