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지 않을 때조차 떠나야 할 시간이 있다."
- 테네시 윌리엄스 (Tennessee Williams)
봄기운이 만연한 4월의 주말, 벚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하윤의 집으로 가는 길, 현우는 아버님께 드릴 안동소주와 어머님께 드릴 향수를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
“어서 와. 아유, 무겁게 뭘 이렇게 사들고 왔어?” 하윤이 활짝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현우는 가볍다는 듯 선물을 들어 보였다. “마음이 무거운 것보다야 몸이 무거운 게 낫지. 부모님은 안에 계셔?”
“응, 들어가서 같이 인사드리자.”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 소파에 두 분이 나란히 앉아 계셨다. 현우는 그 앞에 깔린 방석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윤이와 만나고 있는 강현우라고 합니다. 전에 병원에서 한 번 뵀습니다.”
하윤의 어머니가 값나가는 물건을 감정하듯,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현우를 훑었다. “그래요. 근데 우리 하윤이가 누나인 걸로 아는데 아닌가요?”
꽉 쥐었다. “아, 죄송합니다. 둘이 워낙 격 없이 지내다 보니 습관적으로 그만. 주의하겠습니다.”
“아유, 엄마. 우리 겨우 두 살 차이에 학교 선후배로 만나서 친구처럼 지낸 지가 벌써 7년이야.”
하윤의 말에 현우는 그녀의 무릎을 가볍게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좀 긴장했습니다.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아버님께는 안동소주를, 어머님께는 향수를 준비했습니다.”
묵묵히 현우를 보던 하윤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시장할 텐데 식사부터 하지.”
식사를 하는 내내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아버지는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고, 어머니는 애써 음식을 씹는 듯 보였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이 어색하게 공간을 채웠다. 현우가 분위기를 풀어보려 음식을 칭찬했지만, 짧은 대답에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식사가 끝난 후에야 하윤 아버지의 질문으로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자네, 술은 조금 할 줄 아나?”
“자주 즐기지는 않습니다만, 주시면 감사히 한 잔 받겠습니다.”
아버지가 천천히 현우의 잔을 채우며 물었다. “자네는 그래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
현우는 품에서 명함 두 장을 꺼내 부모님께 각각 드렸다. “지금은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현우의 말에 담긴 숨은 뜻을 파악했다. “‘지금은’이라… 앞으로 다른 계획이 있다는 건가?”
현우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와 또렷한 눈빛으로 답했다. “예. 꾸준히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언젠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로 거듭나고자 합니다. 허황되어 보일 수 있으나, 스무 살부터 지난 7년간 매일 글을 쓰며 작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윤의 부모님은 확신에 찬 현우의 모습에 괜찮은 청년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딸 옆에 이런 '글쟁이'를 두는 게 맞을까 싶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래, 열심히 하는 모습은 보기 좋군. 부모님은 뭘 하시나?”
“아버님은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은 사회복지사로 지금 보육원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현우는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태연하게 답했다.
“솔직히 당장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는 못합니다. 아버님께서 하윤 씨를 챙겨주신 만큼의 경제적 안정을 약속드리긴 어렵습니다. 다만,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행복하게 꾸려나갈 자신은 있습니다.”
하윤이 거들기 시작했다. “맞아, 울 현우가 확실히 생활력이 강해.”
어머니가 하윤에게 눈으로 눈치를 주자, 하윤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뭐래니? 벌써부터 편을 못 들어서 안달이야.”
자리가 끝나고, 하윤이 버스 정류장까지 현우를 데려다주었다. “고생했어, 자기야. 어쩜 그렇게 말을 잘해? 아주 멋있었어.”
“그렇게 어려운 거 물어보신 것도 아닌데 뭘.”
“그래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난 덕분에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
“두 분은 좀 어떠신 것 같아? 나 밉보이거나 그러진 않았지?”
“그럴 게 뭐가 있겠어? 전혀 아니지. 오늘 최고였어.”
정류장 쪽으로 현우가 타야 할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급하게 버스에 올랐다. 집에 도착해서 핸드폰을 보니 모르는 번호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 하윤이 엄마예요. 조만간 따로 만나서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다음 주에 언제 시간 되는 날 있어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는 정중하게 답장을 보냈다.
며칠 뒤 약속한 한정식집. 현우는 자리에 앉은 하윤의 어머니를 맞이했다.
“일찍 왔네요. 식사는 정식으로 2인 하죠.”
분위기는 지독하게 어색했다.
“어머님, 혹시 어쩐 일로 보자고 하셨는지요?”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흔들림 없는 눈으로 현우를 마주 보았다. “본론부터 얘기할게요. 나는 현우 씨가 우리 하윤이 만나는 거 별로 탐탁지 않아요.”
예상했던 말이었기에 현우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혹시 제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일단, 안정감 없는 직장이죠. 난 우리 딸이 불안한 환경에서 사는 거 원치 않아요. 그렇다고 큰일 있을 때 받쳐줄 부모님이 계신 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지금 현우 씨가 외모나 학벌 말고는 우리 딸에게 견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은데.”
틀린 말이 없어서 현우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찻잔의 찬 표면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 꿈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삶과는 꽤나 거리가 멀어 보이더군요.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정말 다 포기하고 가족에게 집중할 수 있겠어요?” 그 질문에 현우는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말로라도 그게 포기가 안 되는데,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가장이 될 수 있겠어요? 현우 씨는 야망이 넘쳐 보여요. 분명 좋은 사람인 건 알겠지만, 야망 넘치는 사람이 가정에 충실할 수는 없어요.”
어머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현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우리 하윤이가 상처받길 원하지 않아요. 꿈이 클수록 그 꿈을 담지 못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는 법인데, 내 딸이지만 우리 하윤이가 당신을 담을 그릇이 되지는 못해요. 키워 본 내가 제일 잘 알지.”
“제가 하윤이를 행복하게 해주기 어렵다는 다른 이유들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윤 씨가 그릇이 작다는 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따님은 제가 본 누구보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건 하윤이 능력이고, 마음이 아직 여려. 심지가 너무 곧은 사람하고는 어울리기 힘들어요.”
현우는 다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신의 고집에 하윤을 울렸던 밤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머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어머님과 제가 할 이야기가 아니라, 어머님과 따님이, 그리고 따님과 제가 각자 따로 해야 할 이야기인 듯합니다.”
하윤의 어머니가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충분히 얘기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앞으로는 안 볼 수 있게 하윤이랑 잘 정리했으면 해요.”
밥 먹을 기분이 아닌 현우도 자리에서 일어나 결제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피지도 않는 담배가 생각날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그날 저녁, 기가 다 빨린 상태로 현우는 윤민에게 연락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윤민과 나희가 먼저 와서 치킨을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 보기 좋네. 너네 이러다 헤어지면 안 된다. 나 진짜 뻘쭘해 양쪽으로.”
나희가 현우의 등짝을 애정을 담아 내리쳤다. “그래서 오늘 왜 보자고 한 거야?”
"오늘 하윤이 어머님하고 둘이 만나서 얘기를 좀 했어."
“만나서 뭐라셨길래 이렇게 죽상을 하고 있어?” 나희가 물었다.
“그냥 뭐… 하윤이랑 그만 만났으면 한다고 하시네.”
현우는 하윤의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설명했다. 윤민이 입을 열었다.
“네가 이해해라. 어른들이 좀 꽉 막힌 부분들이 있잖아. 이제 어쩔 거야?”
“글쎄. 집안의 반대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변수라 모르겠다.”
나희가 닭 다리를 야무지게 발라 먹다가, 치킨을 못 집는 현우에게 포크를 건네며 말했다.
“하기사, 어른들이 너보고 싫어하는 경우는 드물지. 근데 이런 건 당사자가 직접 해결해야 하는 거야.”
“당사자인 내가 해결을 못했다니까?” 나희는 어이없다는 듯 현우를 바라봤다.
“아니, 하윤 언니. 하윤 언니가 당사자지. 자기 부모님이 반대하는 남자를 만나려면 하윤 언니가 더 적극적으로 나와야지. 너 혼자 발 동동 구를 게 아니라, 언니가 소통의 다리 역할을 하게 만들어야 된다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현우의 표정에 나희는 속이 터지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아휴, 답답아. 진짜 결혼하려면 가운데 있는 사람이 줄타기를 잘해야 해. 네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가운데 사람이 중재를 못 하고 너랑 어머님 사이의 간극을 못 좁히면 그때부터 지옥이야.”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일단 언니한테 가서 솔직하게 상황 설명을 해. 어머님이 무슨 말을 하셨는지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다 말해. 그리고 물어봐. 언니는 전적으로 네 편인지, 앞으로 이 반대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그다음에는?”
“하… 그런 다음에는, 하윤 언니가 어떻게 얘기하냐에 따라 다르겠지.”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데?”
나희가 머리를 짚었다.
“네가 들어봤을 때 어머님 편을 들면서 갈등을 해결해주지 못할 것 같으면 불행한 결혼 생활이 될 거고, 완전히 네 편에서 든든하게 해결할 방안이 나오면 완전한 네 편이 하나 확실하게 생기는 거지.”
여전히 하윤의 반응이 예상되지 않아 나희의 말이 다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현우는 우선 알겠다고 둘러댔다.
윤민이 대화를 정리했다. “백날 여기서 말해봐야 뭐 하냐? 빨리 하윤 누나랑 얘기를 해야지.”
“안 그래도 내일 만나서 얘기할 거야. 근데 이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나가 문제인 거지.”
“괜히 너 되도 않는 방식으로 포장하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 하윤 누나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에휴. 뭐 이렇게 쉬운 게 없냐. 일단 알겠어. 들어가자. 여기 계산은 내가 할게.”
집으로 돌아와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윤이라는 산을 이제 넘었나 했더니 더 높은 하윤의 부모님이라는 산이 그의 등반을 기다리고 있었다. 넘으려 할수록 더 높아지는 결혼이라는 산이 과연 완등할 수 있는 산인지 의문을 품게 하는 한 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