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단어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그 어떤 단어도 적절한 시간의 침묵만큼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 마크 트웨인 (Mark Twain)
윤민, 나희와의 만남 이후 하루가 지난 화요일 저녁, 현우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하윤의 자취방을 찾았다. 차가운 복도를 걷는 내내 어제 친구들과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서 되감겼다.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전달해.’ 그 조언은 유리 조각처럼 뾰족하게 남아, 생각이 그쪽으로 향할 때마다 마음을 찔렀다.
문이 열렸다. 문틈에 서 있는 하윤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없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화장기 없는 얼굴이 유난히 창백했다. 일과 고민에 지친 피로감이 짙게 배인 무표정이 그를 맞았다.
그녀는 “왔어?”라는 말도 없이 현관을 열어주고, 먼저 거실로 걸어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 지친 뒷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었다.
현우는 천천히 신발을 벗었다. 현관을 넘어선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바깥 복도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의 발걸음은 납처럼 무거웠고, 손끝은 긴장으로 땀에 젖어 있었다.
“피곤해 보이네. 회사에서 힘든 일 있었어?” 현우가 조심스레 묻자, 하윤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전혀 다른 질문이 나왔다.
“자기… 어제 우리 엄마 만났어?”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해서 오히려 현우의 심장을 서늘하게 했다.
그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숨을 골랐다. “응. 잠깐.” 짧은 대답이었지만, 목소리에는 애써 감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하윤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다가, 희미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래, 다 알겠네.”
“뭘 알겠다는 거야?”
“엄마한테 얘기 들었어. 굳이 자세히 안 물어봐도, 당신 표정 보니까 무슨 대화가 오갔을지 알 것 같다고.”
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얇게 눌린 분노와 체념이 섞여 있었다.
예견된 재앙을 마주한 사람처럼, 모든 것을 안다는 듯한 그 태도가 현우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하윤아, 난 그냥… 우리가 오래 가려면, 주변 사람들 마음도 좀 열어야 한다고 생각해.”
“주변? 주변이 그렇게 중요해?” 하윤이 소파에 기댔던 몸을 앞으로 숙이며 되물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나는 우리가 좋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우리 사이에 자꾸 다른 사람 시선이 들어와야 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과방에서 밤새 글 쓸 때, 그때 누구 허락받고 시작했어? 아니잖아. 그냥 우리 둘이면 충분했잖아.”
현우는 순간 말이 막혔다. 그녀의 시선이 너무 똑바로, 깊이 꽂혀서 함부로 단어를 꺼낼 수 없었다.
“결혼이라는 건 결국 가족끼리도 얽히는 거잖아. 그걸 무시하고 가면… 나중에 힘들어질 수도 있어. 나와의 결혼으로 자기 가족관계가 망가지면, 그 죄책감이 언젠가 우리를 괴롭히게 될 거야.”
“그래서? 엄마 마음을 바꾸려고 애쓰는 거야? 엄마가 원하는 기준에 당신을 맞추려고?”
현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우리가 더 편해질 거니까.”
“나는, 그 ‘편함’이라는 게 우리만의 게 아니면 아무 의미 없어.”
거실 안 공기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창문 너머 가로등 불빛이 느리게 흔들렸고, 냉장고의 규칙적인 모터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하윤아, 정말 가족들이랑 연 끊고도 나랑 결혼해서 행복할 수 있겠어? 단순히 결혼 문제가 아니라, 연애만 지속해도 어머님 생각을 돌리지 못하면 우리가 온전히 행복할 수 있냐고. 난 네가 불편해질까 봐 그러는 거야.”
“아니, 난 오히려 그게 더 불편해.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허락 없이는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처럼 느껴져.”
그 말은 현우의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 그가 입을 열기 전 하윤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뭐라고 하든, 난 내 선택으로 여기 있는 거야. 근데 당신은 그걸 믿지 않는 것 같아.”
“믿어. 그렇지만 현실적인 문제도 생각해야지.”
“아니,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말 안 해.” 하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막말로 현우 너희 어머니가 나를 반대하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해봐. 너, 지금 나처럼 이렇게 현실 따지면서 고민했겠어? 아니면 어떻게든 어머니 설득하고, 설득 안 되면 연 끊을 생각하고 내 손 잡았겠어?”
“그야…”
“거봐. 결국 너도 같은 상황이면 나처럼 생각하지 않았겠어?”
“우리 엄마는 그럴 처지가 못되시지. 반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순간, 거실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보다 더 차갑게 식었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현우는 아차 싶었다. 그의 말에는 스스로도 몰랐던 깊은 자격지심이 묻어 있었다. 하윤은 더 이상 그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에 깃든 것은 분노가 아닌, 낯선 연민과 깊은 피로감이었다.
“내가 너희 어머님을 몰라? 그럴 분이 아니니까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거지.”
이 역시 틀린 말이 아니었다. 현우는 살면서 부모의 뜻을 거역해야 하는 큰 저항에 부딪혀 본 적이 없었다.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고, 하윤은 소파 팔걸이를 손톱으로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드드득' 하고 가죽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그럼, 네 말대로 하면, 정말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해?”
“문제가 생겨도 같이 해결하면 되잖아! 왜 싸워보기도 전에 질 거라고 생각해?”
“그게 그렇게 쉬우면 세상 모든 연인이 이미 결혼했지.”
말을 마치자마자, 현우는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차갑고 비관적이었는지 깨달았다. 하윤의 눈빛이 상처받은 듯 흔들렸지만, 금세 다시 굳어졌다.
“봐, 당신은 항상 이렇게 현실을 먼저 생각하잖아. 나는 그게 싫어. 가끔은 그냥 다 괜찮을 거라고, 내가 옆에 있겠다고 말해주면 안 되는 거야?”
결국 말들은 제자리를 맴돌았고,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둘 다 알았다. 깊은 피로감에 하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먹을래? 그냥 라면 끓일게.”
“그래…. 내가 끓일게. 앉아있어.”
어색한 침묵 속에서 현우는 익숙하게 찬장을 열어 라면을 꺼냈다. 끓는 물소리와 면 익는 냄새,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식탁 위로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지만, 그 온기는 둘 사이의 냉기를 녹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의무처럼 기계적으로 면을 입으로 가져갔다. 후루룩, 면을 삼키는 소리만이 어색하게 울렸다.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밤, 현우가 돌아가려 신발을 신을 때, 하윤은 현관문에 기댄 채 조용히 말했다.
“미안, 오늘 내가 좀 예민했어.” 현우는 신발 끈을 고쳐 매며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나도 미안.”
그 짧은 사과에는 어떤 해결책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늘의 싸움을 잠시 멈추자는, 위태로운 휴전 신호일 뿐이었다. 현관문이 닫히고 혼자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현우는 둘 사이에 선명하게 그어진 균열을 느꼈다.
그 균열은, 눈에 보이지 않게, 그러나 확실하게 조금씩 더 넓어지고 있었다. 문밖의 차가운 밤공기가 그 틈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