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는 시간의 문제이지만, 때로는 기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 히포크라테스 (Hippocrates)
몇 번의 여행이 더 반복되었다. 하윤은 위태로운 약속을 지키려는 듯, 매 여행에서 세 문장 정도는 글을 써 내려가려 애썼다. 종종 그마저도 쓰지 못하는 날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현우의 입술은 굳게 닫혔다. 그의 침묵은 어떤 질책보다 무거웠고, 그 무게에 하윤은 점점 더 펜을 드는 것을 망설였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관계 속에서, 늦여름 무더위가 한풀 꺾인 8월의 어느 주말, 두 사람은 간만에 여행 없이 하윤의 자취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현우는 지난 넉 달간 하윤이 모아온 글 뭉치를 읽으며, 그녀가 사 온 떡볶이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앗! 흘렸다. 물티슈 있어?” 흰 티셔츠 위로 선명한 주홍색 점이 번졌다.
“에휴, 그러게 다 먹고 읽으라니까. 물티슈로 닦으면 번져. 싱크대 가서 퐁퐁으로 지워.”
현우는 싱크대로 뛰어가 옷을 문지르며 말했다. “자기가 계속 꽁꽁 싸매고 안 보여줬잖아.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뭐, 매번 쓰지는 못했어도 그 세 문장 약속 지키려고 나름 노력했어.” 뿌듯한 듯 하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좋네. 이제 이걸로 뭘 쓸 거야?”
“음… 아마 여행 에세이를 쓰지 싶어. 그쪽이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아서.”
현우는 과장되게 박수를 쳤다. “확실히 잘 어울리네. 감정선도 잘 잡고 표현이 워낙 섬세하니까.”
하윤이 쑥스러워하며 답했다. “글쎄, 뭐 해보면 알겠지. 고마워.”
그녀는 냉장고에서 샤인머스캣 한 송이를 꺼내왔다. 접시에 담긴 연둣빛 포도를 내려놓으며 하윤은 한 알을 집어 먹었다. “자기 좋아하는 디저트 대령이요. 이거 진짜 맛있다.”
현우도 가장 좋아하는 과일에 눈이 돌아 한 알을 베어 물었다.
그러나 입안에 퍼진 것은 달콤한 과즙이 아니었다. 시큼하게 쉰 냄새와 불쾌한 씁쓸함이 혀를 때렸다. “퉤퉤퉤. 이거 완전히 상했잖아?”
그는 입에 들어간 것을 뱉어내고는 곧장 싱크대로 가 송이째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
당황한 하윤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야. 내가 먹었을 때는 멀쩡했어.”
현우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억눌러왔던 인내심의 둑이, 이 사소한 과일 하나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 제발, 너 음식 상한 거 구분 못 하잖아. 어떻게 이걸 아무렇지 않게 먹어?”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인 것은 알지만, 상의도 없이 자신이 사 온 것을 쓰레기로 만든 현우의 태도를 하윤은 납득할 수 없었다.
“분명히 멀쩡했어. 이상한 게 몇 알 있으면 그것만 빼고 먹으면 되지.”
“음식이 부패하면 주변도 오염돼. 그걸 왜 먹냐고!” 현우의 언성이 높아졌다.
“알겠어. 근데 그게 왜 상한 거야?”
“하… 물컹하고 시큼한 게 안 느껴져? 너 이런 식으로 음식 관리 못 하면서, 계속 욕심부려서 냉장고 채워놓지 말라고!”
“아니, 나는 궁금해서…”
“궁금? 내가 멀쩡한 걸 상했다고 버렸을까 봐?”
“내가 먹은 부분은 멀쩡했는데 물어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산 거고, 네가 마음대로 버렸는데!” 져줄 생각도,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없는 현우에게 하윤은 깊은 서운함을 느꼈다.
“하… 됐다. 뭔 얘기를 더 하냐. 그냥 그만하자. 나 갈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우의 팔을 하윤이 빠르게 낚아챘다. “뭘 그만하자는 거야?”
“이 얘기 그만하자고. 오늘 끝날 것 같지도 않고, 지금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러는 것도 어이가 없고.” 현우는 하윤의 팔을 거칠게 걷어치우고 밖으로 나갔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한 시간 내내 고민해도, 그의 머릿속 결론은 같았다.
‘나는 잘못이 없다.’
분노가 들끓었다. 상대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이 왜 매번 트집 잡힐 일이 되어야 하는가. 잘못을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지난 일 년간 쌓여온 부정적인 생각의 소용돌이가 그를 집어삼켰다.
하윤은 하윤대로, 이 사소한 일이 이토록 큰 싸움으로 번져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어린애를 혼내다 지쳐 떠난 사람처럼 사라진 현우가 원망스러웠다.
두 사람의 관계에 깊어지던 감정의 골은, 결국 썩은 과일 한 송이 앞에서 그 바닥을 드러냈다. 다만 서로는 각자 자신이 받은 상처만 돌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일주일 뒤, 두 사람은 하윤의 자취방 근처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창밖으로는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지만,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동안 잘 지냈어?” 하윤이 먼저 물었다.
“뭐, 그냥저냥 살았어.” 현우는 여전히 날이 선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다행이네. 난 별로였는데.” 하윤의 목소리는 싸울 기운마저 없는 듯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현우가 쏘아붙였다.
“넌 나한테 미안한 게 없어?”
“큰소리친 건 미안하지. 근데 네가 매번 비슷한 실수를 하는 걸 보는 게 너무 스트레스야. 너는 그 부분에 대한 사과가 없었잖아.”
하윤의 눈에 눈물이 차올라 표면장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난 정말… 네가 먼저 사과하면 오늘 잘 풀어볼 생각이었거든.”
울먹이는 목소리를 삼키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근데 안 되겠어. 이건 이제 나한테 못할 짓인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헤어지자고?” 예상치 못한 전개에 현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응. 우리 헤어지자. 너는 항상 너가 정답지 잖아. 그리고 나는 매번 오답을 찍는 모자란 학생이고.”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현우야, 너랑 있으면 내가 엄청 잘못 살고 있는 사람 같아.”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았던 하윤은, 현우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지내. 이제 앞으론 못 볼 것 같다.”
2021년 8월 28일, 그들의 4년 남짓한 연애가 몇 마디 말과 함께 허망하게 끝났다.
헤어짐에 준비가 되어 있던 하윤과 달리, 현우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첫 달은 ‘차라리 잘 됐다’며 찌질한 자기 위로를 했다.
그러나 그 시간의 끝에 남은 것은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자신에 대한 혹독한 자책이었다. 그녀의 속도를 기다려주지 못했던 조급함, 염려라는 이름으로 행했던 예민함,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던 오만함.
그는 매일 밤 자신을 탓하며 또 한 달을 보냈다.
그동안 하윤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녀는 현우의 단단한 자아에 억눌려 잃어버렸던 자신의 리듬을 되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생전 슬픈 영화를 봐도 울어본 적 없던 현우가 밤마다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고, 베갯잇은 축축하게 젖어갔다. 보다 못한 현수가 등을 떠밀어 나온 거리에는 어느새 단풍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눈부신 가을날, 오손도손 붙어 다니는 연인들 사이로 현우의 뚫린 가슴에는 차가운 바람이 들었다. 하윤이 사라지자, 잠시 시간을 내어 얼굴을 보자고 부를 사람조차 마땅치 않았다.
결국 그는 윤민과 나희에게 연락해 이별을 고했다. 세 사람은 늘 그렇듯 동네 호프집에 모여 앉았다. 현우는 그간의 일을 설명하고는 초점 잃은 눈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윤민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현우야! 뭘 그렇게 멍을 때려. 그렇게 힘들고 미안하면 가서 사과하고 다시 만나자고 해야지.”
나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참에 마무리해. 둘 다 서로 괴롭히지 말고. 언니도 이미 끝이 보이니까 그런 것 같고, 너도 사실 알잖아. 그래서 지금까지 합리화했던 거 아니야?”
윤민이 소름 돋는다는 듯 팔을 쓸어내렸다.
“내 여자친구지만, 이럴 때 보면 완전 냉혈한이야.”
나름의 농담에도 현우는 한숨만 늘어놓았다.
계속 초점이 풀린 현우를 보며 나희가 쓴소리를 시작했다.
“냉혈한이 아니라 현실을 보라는 거야. 헤어진 지 두 달이나 지나서, 후폭풍 와서 찌질하게 잡는 것밖에 더 돼? 그동안 완전히 폐인이었을 거 아냐. 멀쩡하게 자기 삶 살다가 문득 후회돼서 잡으려 해도 어려울 판에, 이별에 무너져서 갈피 못 잡는 사람을 누가 다시 만나고 싶겠니? 그러게 왜 헤어질 정도로 밀어붙여서 스스로를 괴롭혀.”
틀린 말이 하나 없는 나희의 말들은, 사실이라는 이름의 칼날이 되어 그의 아픈 가슴을 난도질했다. 문득, 자신이 하윤에게 쏟아냈던 쓴소리들이 그녀에게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어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윤민은 말없이 냅킨 몇 장을 뽑아 그에게 건네주며 등을 두들겨 주었다. “나희야. 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얘기해. 안 그래도 애 힘든데.”
“현우도 정신 차려야지.”
냉랭한 말투였으나, 그 속엔 친구를 향한 진심 어린 염려가 담겨 있었다.
“우리도 이제 각자 인생 꾸려가야 하는 중요한 시기인데, 재능 넘치는 애가 이렇게 무너져 있는 걸 어떻게 봐. 당장은 아파도 이게 약이야.”
“사과는 해야겠다. 나희 얘기를 들으니까 더욱이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아.” 현우가 맥없이, 그러나 희미하게 안광을 찾으며 한 첫마디였다.
“굳이? 그건 너 마음 편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이제 마음 정리 잘하고 있을 사람한테 그게 정말 그 사람을 위하는 건지 다시 생각해봐.” 이번에도 나희는 핵심을 간파했다.
현우는 또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과는 핑계였다. 그저 그녀를 잡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봐, 아무 말도 못 하잖아. 힘들 만큼 힘들어했으니까 이제 그만 일상으로 돌아와. 네 주변 사람들도 챙겨야지. 오늘도 현수가 억지로 밖으로 내보냈다며. 오죽하면 걔가 너한테 뭘 시키겠니?”
그 말을 끝으로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나희의 말은 현우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결국 ‘사과’라는 단어만이 남았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혼신을 다해, 자신의 모든 후회와 미안함을 담아 장문의 메시지를 썼다.
그 긴 글에 하윤의 답은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답장. 그 침묵 속에서, 현우는 비로소 이별을 현실로 인정하고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그의 20대의 가장 길었던 장(章)이, 그렇게 소리 없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