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2022년 12월 24일

by msg

"시간은 위대한 치유자이지만, 서투른 미용사이다."

- 루실 S. 하퍼 (Lucille S. Harper)



하윤에게 보낸 장문의 메시지는 읽음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2021년 10월, 붉은 단풍잎이 거리를 뒤덮던 계절이었다. 그로부터 1년 하고도 2개월이 흘렀다. 계절은 다섯 번 바뀌었고, 현우의 세상도 그만큼의 지각 변동을 겪었다.


그는 스스로를 방 안에 가뒀다. 창문 너머로 계절이 바뀌는 것을 무심히 흘려보냈다. 슬픔은 연료가 되었고, 후회는 잉크가 되었다. 텅 빈 모니터 앞에서 밤을 새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그의 유일한 생존 신호였다. 잠들기 위해 술을 마셨고, 깨어나기 위해 커피를 쏟아부었다. 이별의 고통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그보다 더한 창작의 고통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사랑의 배신과 인간의 밑바닥을 파고드는, 지독하고 냉소적인 스릴러 시나리오가 태어났다.

크리스마스이브, 차가운 밤공기가 거리를 감싸던 날, 현우는 두꺼운 원고 뭉치를 들고 윤민과 나희를 만났다. 1년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지만, 예전처럼 공허한 눈빛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날카롭게 벼려진 작가의 예민함과 지독한 몰입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게… 지난 1년간 내가 죽어라 글만 쓴 결과야. 아직 다듬을 부분이 많지만 초고는 다 써서 너희한테 평가받고 싶었어.” 현우는 테이블 위에 원고를 올려놓았다.


윤민과 나희는 말없이 원고를 나눠 들고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가게 안의 캐럴 소리가 멀게 들릴 때쯤, 나희가 '후' 하는 긴 숨과 함께 먼저 고개를 들었다.


“현우야… 이거….”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감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쓴 글 중에 최고야. 문장 하나하나에 칼날이 서 있어.”


윤민도 동의했다. “미쳤다, 진짜. 하윤 누나랑 헤어진 게 너한테 약이 됐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독해져? 근데… 너무 재밌어.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네.”


친구들의 진심 어린 긍정에 현우는 그제야 멋쩍게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주먹이 스르르 풀렸다. 지난 1년간 그를 지탱해온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소정’이었다.


“선생님!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저 선생님 집 근처인데, 연말 인사라도 드리려고요.”


“아, 내가 지금 친구들이랑 있어서 어렵겠는데.”


눈치 빠른 나희가 입모양으로 물었다. ‘누군데? 이 시간에?’


잠시 망설이던 현우는 친구들을 둘러봤다.

“그… 내 제자인데 근처라고 잠시 볼 수 있냐고 하네.”


나희가 윤민을 쿡쿡 찌르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고 해. 좋은 소식 있는데 같이 축하해야지.”


얼마 후, 조금 상기된 얼굴의 소정이 약속 장소로 들어섰다. 그녀는 윤민과 나희에게 깍듯하게 인사하고 현우의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자연스럽게 현우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나희가 넌지시 말했다.


“얘, 1년 넘게 연애도 안 하고 글만 썼잖아. 이제 좀 사람답게 살아야지.”


그 말에 소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선생님… 헤어지셨어요?”


현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정의 얼굴에 스치는 복잡한 감정을 그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술자리가 파하고, 윤민과 나희가 먼저 자리를 떴다. 현우는 소정을 바래다주기 위해 함께 걸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규칙적으로 울렸다. 밤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어색하면서도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소정이 걸음을 멈췄다.


“선생님.”


“응?”


“사실 저… 처음에는 선생님 정말 싫어했어요.”


예상치 못한 말에 현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정은 붉어진 뺨을 애써 감추며 말을 이었다. “고3 때, 선생님은 유독 저한테만 더 혹독하셨잖아요. 다른 애들한테는 칭찬도 해주시면서, 제 글에는 늘 날카로운 지적만 하셨죠. 재능도 없으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독설처럼 들렸어요. 그래서… 정말 많이 미워했어요.”


그녀의 기억은 정확했다. 현우는 유독 재능이 있지만, 환경 때문에 위축된 학생들에게 더욱 모질게 굴었다. 어설픈 위로보다 냉정한 현실 인식이 그들을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라 믿었다.


“수능이 끝나고, 저는 작가의 꿈을 완전히 접으려고 했어요. 선생님 말대로, 재능도 없는데 헛된 꿈을 꾸는 건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날 밤, 선생님한테서 메일이 왔죠.”


소정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제목: 너라서 이러고 쓴다.

보낸 시간: 오후 11:47

오늘 내 말이 상처가 됐다는 걸 알아. 하지만 사과나 위로보다는 현실적인 얘기를 해주고 싶어.

나는 재능 없는 사람에게는 기대도 독설도 하지 않아. 너는 분명히 아주 큰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야.

네 글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 그걸 돈 때문에, 혹은 내 말 몇 마디 때문에 접는다면 그건 네 재능에 대한 배신이야.

내가 어떻게든 계속 글 쓸 수 있게 도울 테니, 절대 포기하지 말고 너는 네 갈 길을 가.

첨부: _2023_문학장학금_모음.pdf / 공모전_달력_샘플.xlsx


소정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 메일을 읽고 밤새 울었어요. 선생님의 독설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응원이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리고 그게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동경하게 된 게요.”


과거의 이야기가 끝나자, 둘 사이의 침묵은 이전과 다른 무게를 가졌다. 소정은 마침내 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아까 선생님이 헤어지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조금은, 아주 조금은 기뻤어요. 저, 선생님 좋아해요. 아주 오래전부터요.”


예상치 못한 고백이었다. 현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이, 지난 1년간 얼어붙어 있던 그의 심장을 당황스럽게 녹이는 듯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기였다. 잠시, 아주 잠시 이 온기에 기대고 싶다는 이기적인 유혹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하윤에게 상처를 줬던 과거의 자신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현우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하고 따뜻했다.


“마음 전해줘서 정말 고마워. 진심이야. 하지만… 미안해. 지금의 나는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망가진 상태야. 내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텅 비어 있는 기분이라, 이 상태로 너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는 건 너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는 일이야.”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가장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소정아, 너는 나한테 언제나 최고의 제자야. 내가 처음으로 잘 길러낸 제자이자, 내 글을 믿고 따라와 주는 소중한 후배. 나는 그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아.”


그의 눈에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없다는, 가장 정중하고도 단호한 거절이었다. 소정의 눈가가 살짝 젖어 들었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선생님이 어떤 마음인지. 그리고 그걸 알아서 정말 괜찮아요.”

그녀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주세요. 언젠가, 아주 먼 훗날이라도 선생님 마음이 괜찮아지면… 그때는 저한테도 아주 작은 기회라도 주시겠다고요.”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 소정의 뒷모습을 보며, 현우는 가슴 한편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닫혀버린 하윤과의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상의 문이 아주 조금,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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