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위해 한 일은 자신과 함께 죽지만, 타인과 세상을 위해 한 일은 영원히 남는다."
- 앨버트 파인 (Albert Pine)
현우는 책상 앞에 앉아, 낡은 만년필을 쥐었다. 사각,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고요한 방을 채웠다. 노트북의 차가운 자판 대신,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아날로그적인 감각이 필요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첫 문장을 써 내려갔다.
‘이 편지가 너에게 닿을 때쯤, 나의 마지막 대본은 거의 완성 단계에 있을 거야.’
편지의 수신인을 떠올리자, 그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1년 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2024년 초봄, 하윤과의 이별 후 폐인처럼 써 내려간 스릴러 시나리오가 한 방송사의 미니시리즈로 제작 결정되었다. 마감까지 시간이 빠듯해 당장 함께할 보조작가가 필요했다.
여러 이름을 떠올렸지만 마땅치 않았다.
하윤과는 다시 작업할 수 없을 것이고, 윤민은 결혼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아주 좁은 인간관계를 가진 그의 머릿속에 남는 사람은 단 한 명, 소정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도 소정은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다. 둘의 공동 작업은 시작부터 놀라울 정도의 시너지를 냈다. 현우가 이야기의 뼈대를 세우고 인물의 어두운 심연을 파고들면, 소정은 특유의 성실함과 신선한 시각으로 그 뼈대에 살을 붙였다.
회의실 화이트보드는 붉고 푸른 글씨들로 빼곡했다.
“선생님, 3부 엔딩에서 범인의 동기가 너무 평면적인 것 같아요. 단순한 복수심으로는 이 정도의 잔혹함을 설명하기 어려워요.”
현우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소정이 며칠 밤을 새워 조사한 자료들을 내밀었다.
“제가 찾아본 범죄 심리학 논문에 따르면, 이런 유형의 범죄자들은 종종 피해자에게서 자기혐오의 대상을 발견한다고 해요. 파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거죠. 뒤틀린 자기애의 발현일 수 있다는 거예요.”
소정의 논리 정연한 분석은 현우의 막힌 혈을 뚫어주었다.
“그래, 그거다! 소정아, 네 덕분에 이야기가 입체성을 갖게 됐어.” 현우가 그녀의 자료를 바탕으로 인물의 서사를 엮어내자, 평면적이던 악역은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입체적인 괴물이 되었다.
함께 밤을 새우는 날이 잦아졌고, 작업실에는 늘 소정이 사 온, 현우가 좋아하는 원두의 커피 향이 감돌았다. 처음에는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현우는 그녀의 시선에 담긴 또 다른 의미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작업이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소정의 감정은 더욱 선명해졌다. 대본 메모에 사적인 질문이 섞이기 시작했고, 작업이 끝난 후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그의 곁에 더 머무르려 했다.
어느 늦은 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을 때였다. “선생님은 근데, 정말 대단하세요.” 소정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저는 선생님 처음 뵀을 때부터 정말 어른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선생님 나이가 겨우 지금 제 나이 정도 되는거 잖아요. 어쩜 그 나이에 그렇게 똑부러지고, 흔들림이 없으셨어요?”
“뭐? 내가 그때 지금 네 나이였다고?” 현우가 멋쩍게 웃었다.
“아니에요? 최소 저보다 한 대여섯 살은 많으신 줄 알았는데….”
그 말에 현우가 라면 국물을 뿜을 뻔했다. “뭐? 최소 대여섯 살?”
“네? 아니에요?” 소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 그때 스무 살이었는데. 너랑 한 살 차이야.”
소정은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현우를 쳐다봤다. 젓가락을 쥔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헐. 진짜요? 죄송해요, 저는 당연히… 스무 살 때 선생님이 워낙 어른 같으셔서….”
“학원 강사 할 때부터 다들 그렇게 보더라고. 하도 애늙은이 같아서.”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훨씬 어른 같아서요. 생각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소정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현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당황해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뜨거운 라면 국물을 급하게 들이켜다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 모습을 본 소정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선생님 얼굴 빨개지셨다. 귀여우셔.”
그녀의 놀림에 현우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소정이 더 이상 마냥 어리기만 한 제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가진, 한 명의 동등한 인격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의 마음을 미묘하게 흔들었다.
소정의 호감을 인지하고서부터, 현우는 밤샘 작업 중에도 문득문득 하윤과의 과거를 떠올렸다. 소정과의 치열한 토론 속에서, 그는 하윤과 나누었던 대화를 그리워했고, 그 추억들이 아직 새로운 누군가를 들이기에는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체 대본의 초고가 완성되던 날, 현우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소정아,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네가 없었다면 이 작품, 절대 이렇게 못 나왔을 거야.”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 옆에서 배울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제 이 작품은 내 손을 떠나 감독과 배우들에게 넘어갈 거야. 그리고… 우리의 공동 작업도 여기까지인 것 같아.”
소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네?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아니, 절대 아니야.”
현우는 진심을 다해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내가 본 누구보다 재능 있고 성실한 후배야. 내가 보증해. 하지만… 프로페셔널한 관계에 개인적인 감정이 섞이면, 결국엔 둘 다 상처받게 돼.”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소정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감추려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녀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알아요. 선생님 마음이 어떤지. 제가… 선을 넘었던 것 같아요. 죄송해요.”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야. 내가 먼저 단단하게 선을 그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현우는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사실 아직도 이전 연애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질 못했나 봐. 너와 함께 작업하는 동안 너무 고맙고 행복했지만, 그 순간순간에도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나를 보면서… 더 이상 이런 관계가 너한테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어. 정말 미안하다.”
“그럼 저한테는 앞으로도 선생님 마음에 자리할 기회가 없는 건가요?” 소정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미안해. 나도 전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 내 모든 말이 비겁하다는 걸 알아. 그만큼 내가 부족한 사람인 거지. 다시 한번 미안하다.”
안절부절못하며 현우는 소정에게 휴지를 건넸다. 휴지를 받아든 소정은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호흡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녀가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그래도… 약속 하나는 지켜주세요.”
“약속?”
“언젠가 선생님 인생의 대표작이 될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저한테 한 권 주시기로 한 거요. 연인이든, 동료든 아니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선생님의 제자로서, 그 약속만큼은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눈물을 닦고, 다시 한번 현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작가로서의 저에게는, 그게 지표로써 꼭 필요해요.” 그녀는 단호하고도 애틋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제 와서야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죽는 날까지 후회할 날이었다.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줄 사람을 놓친 한심한 기억.
그렇지만 고생시킬 사람을 한 명 줄인 복잡 미묘한 기억의 끝에서,
현우는 다시 눈앞의 편지지로 시선을 돌렸다.
박 대표에게 주소를 넘기며 했던 부탁은, 바로 그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편지는 내일 회의 시간에 두 사람에게 맡길 참이었다. 그는 다시 펜을 들고, 마지막 문장들을 써 내려갔다.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너에게 보낸다. 네 마음을 받았을 때, 나는 아직 누구의 마음도 담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웠다. 너와의 작업은 내 작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 중 하나였어.
이 시나리오는 내 삶의 기록이다. 작가라는 길 위에서 겪는 수많은 좌절과 기쁨, 어리석음과 성장이 담겨있지. 언젠가 네가 글을 쓰다 길을 잃는 기분이 들 때, 이 이야기가 작은 지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실은, 내가 작가로서 세상에 우뚝 선 후에 웃으며 선물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게 내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래서 조금 서둘러, 나의 마지막 약속을 지킨다.
부디, 너는 나보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길 바란다. 항상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리고 덕분에 정말 행복했어.
— 너의 영원한 롤모델로 남고픈 현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