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2025년 5월 21일

by msg

"상처는 빛이 들어오는 곳이다."
- 잘랄루딘 루미 (Rumi)


2025년 5월 21일


테이블 위에는 현우가 지난주에 넘긴, 스무 장에 달하는 원고 뭉치가 놓여 있었다. 박진태 대표는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감회가 새로운 듯 입을 열었다.


“참… 시간이 빠르네요. 작가님을 처음 촬영장에서 뵌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 대본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다니. 작품을 무사히 마무리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아직입니다.” 현우가 닳아빠진 원고의 모서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마지막 장면은, 꼭 한 사람의 조언을 듣고 제 손으로 완성하고 싶어서 비워두었습니다. 그 사람은 제 인생의 여백을 채워주고, 제 상상의 한계를 보완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그의 말에 이준영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말려도 그렇게 하실 텐데요. 뭐, 작가님의 그 고집이 이 작품을 여기까지 끌고 온 힘이겠죠. 꼭 조언을 듣고 완벽하게 결말을 맺어주셨으면 해요.”


현우는 두 사람의 따뜻한 시선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고집’. 그랬다. 어쩌면 그 지독한 고집만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던 그 시절을 버티게 한 유일한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2023년 12월 31일


김 교수 사건 이후, 현우의 세상은 통로 없이 모두 막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증명하기 위해, 완성해두었던 스릴러 시나리오를 들고 수십 군데의 공모전과 제작사에 투고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단 한 뼘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김 교수는 교묘하게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업계에 소문을 퍼뜨렸다. ‘강현우는 스승의 아이디어를 훔치고도 뻔뻔하게 고개 들고 다니는, 인성이 부족한 인간’이라는 낙인이었다. 주요 공모전과 방송사의 심사위원 명단에는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나 제자들이 올라 있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현우의 방에는 반송된 원고 봉투와 ‘귀하의 작품은 아쉽게도…’로 시작하는 이메일들이 먼지처럼 쌓여갔다. 그는 매일 밤 술을 마셨다. 잠들기 위해 마셨고, 깨어나기 위해 마셨다. 술기운에 기대어 잠들지 않으면 악몽에 시달렸고, 악몽에서 깨어나면 다시 술을 찾았다.


결국, 마지막 희망이었던 영화사 공모전에서마저 낙선 통보를 받은 그날 밤, 그는 무너져 내렸다. 비틀거리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지난 몇 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써 내려간 모든 글을,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파일들을 ‘영구 삭제’하기 위해 마우스 위로 손을 올렸다.


삭제 아이콘 위에 커서가 멈췄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시계 초침 소리도, 냉장고 모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거친 숨소리와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만이 고막을 때렸다. 손가락에 맺힌 땀이 트랙패드 위로 얇게 번졌다. 클릭 한 번이면, 그의 20대가, 그의 꿈이, 그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딩-’


정적을 깨고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가르는 한 줄기 빛처럼, 기적처럼 도착한 한 통의 문자였다.


혹시 ‘무음’ 시나리오 쓰신 작가님 되십니까? jkc 방송사 드라마 기획팀 임성현 PD입니다. 보내주신 시나리오, 아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2023년 12월 29일, 드림캐쳐 영화사 사무실


박진태 대표는 며칠 전 업계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강현우’라는 이름을 다시 들었다. 김 교수에게 밉보여 싹수가 잘린 젊은 작가. 재능은 진짜였는데 안타깝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진태는 그 소문 속에서 도대체 어떤 재능이길래 이렇게 아쉬워 하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그는 수소문 끝에 현우가 마지막으로 지원했다 낙방한 공모전의 심사위원이었던 지인에게 연락했다.

“선배, 혹시 강현우라는 작가 지망생 원고, 아직 가지고 계십니까? 그냥… 글이 좀 궁금해서요.”

며칠 뒤, 그의 사무실로 두꺼운 원고 하나가 배달되었다.


그날 밤, 진태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원고를 읽었다. 위스키 잔을 채우는 것도 잊은 채였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건 그냥 재능 있는 학생의 습작이 아니었다. 인간의 심연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과 숨 막히는 서스펜스. 그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이 재능이, 고작 교수의 시기심과 더러운 소문 따위로 묻혀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원고의 첫 장에서 ‘작가 강현우’라는 이름을 붉은 펜으로 그어 지웠다. 그리고 마지막 장, 작가 연락처 란에 딱 한 줄, 그의 휴대폰 번호만을 남겨두었다.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방송사 드라마팀 PD에게 메일을 보냈다.


‘선배, 우연히 작가 미상의 대본을 하나 입수했는데 물건입니다. 이름은 없는데, 연락처는 있더군요. 한번 봐주시죠. 그리고 혹 이거 진행하게 되더라도 제가 드린 건 비밀로 해주시고요.’


그는 현우가 어떤 피해도 입지 않도록, 철저히 그 이름을 숨긴 채로 움직였다. 한 젊은 작가의 꺾인 날개를, 자신의 손으로 다시 펼쳐주고 싶었다.


다시, 2025년 5월 21일


“대표님.” 현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네, 작가님.”


“제가 어떻게 미니시리즈를 맡게 됐는지 얘기 해드린 적이 있었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박 대표와 이 감독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없었던 것 같은데요.”


현우는 2023년 마지막 밤의 기억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모든 공모전에서 떨어지고 작가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려던 그 순간, 어떻게 한 방송사 PD에게서 연락이 왔는지.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아닌, 오직 휴대폰 번호만이 적힌 원고 덕분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이야기를 마친 현우가 박 대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를 세상 밖으로 꺼내주신 그 익명의 은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 마지막 작품이 완성되면, 가장 먼저 그분께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준영 감독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이 기묘한 대화의 의미를 가늠하려 애썼다.


현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박진태 대표가 아주 오랜 침묵 끝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작가님.”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부담스러워서 작업에 영향을 줄까 봐, 그리고 사실은 좀 쑥스러워서 말을 못 했습니다. 이제는…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찻잔을 감싼 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 익명의 제보자가, 바로 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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