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éry)
2025년 6월 23일
시간은 현우의 몸을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잠식하고 있었다. 예전보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 조금만 움직여도 가빠오는 숨, 약으로도 온전히 감출 수 없는 희미한 통증. 그는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확인했다. 면도날이 스치는 턱선이 전보다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윤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현우야, 잠깐 얼굴 좀 보자. 할 얘기가 있어.”
평소와 다른 진지한 목소리에 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밖으로 나서는 일은 이제 큰 노력이 필요한 일이 되었다.
“무슨 일인데?”
“나오면 알아. 예전에 우리 자주 가던 찻집 있잖아. 거기서 기다릴게. 꼭 와야 돼.”
윤민의 목소리에는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현우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옷이 몸에 걸쳐진 듯 헐거웠다. 뼈대가 드러난 앙상한 어깨, 핏기 없는 입술. 그는 애써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인 찻집에 들어섰을 때, 창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윤민이 아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지난 몇 년간 그의 글 속에서만 존재했던 하윤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현우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녀는 조금 더 성숙해진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맑은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현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아주 깊고 슬픈 강물처럼 잠잠해졌다. 놀란 기색도 없이, 그저 그의 수척해진 모습을 온전히 담아낼 뿐이었다.
며칠 전, 윤민은 하윤에게 연락해 모든 것을 말했다. 현우의 병, 그의 남은 시간, 그리고 그가 자신의 마지막을 담아 써 내려가고 있는 이야기에 대해. 하윤이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주 길고 힘든 고민 끝에 내린, 현우와의 마지막 만남을 위한 선택이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현우가 먼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창가로 들어온 햇살이 찻잔의 수면 위에서 부서졌다. 피어오르는 희미한 국화차 향기가 두 사람 사이의 얼어붙은 시간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윤민이가… 불렀는데.”
“응, 나도. 윤민이가 보자고 했어.”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둘 사이의 시간은 다시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현우는 차를 따르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예전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손이었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결혼 생활은… 어때?”
“좋아. 남편도 좋은 사람이고, 아이도 건강하고.”
그녀는 잠시 자신의 행복을 증명이라도 하듯, 희미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들어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는 그녀를 꼭 닮은 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예쁘다. 눈이 너랑 정말 많이 닮았다.”
사진을 보고 나자, 다시 침묵이 흘렀다. 가게 안의 다른 소음들은 멀어지고, 찻잔을 내려놓는 작은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현우는 떨리는 손을 감추려 찻잔을 움켜쥐었다.
“사실… 이 순간을 수없이 상상했어.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그런데 막상 이렇게 마주 앉으니까, 아무 생각도 안 나네.”
그의 솔직한 고백에 하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현우의 수척해진 얼굴과 떨리는 손끝에서 그가 겪고 있을 고통의 무게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있잖아, 하윤아.” 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우리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썼어. 네 허락도 없이. 이제 거의 다 완성해가는데… 그래도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었어. 내가 이 이야기를 완성해도 괜찮을까?”
하윤의 눈에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그건 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너의 삶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말은 못했지만 언젠가 네가 우리가 함께 쓰던 모든 이야기를 다 완성시켜주길 바랐어. 우리 둘이 함께한 순간들도 포함해서.”
“고마워.” 현우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좋은 사람 만나서 좋은 가정을 이룬 것 같아서… 정말 좋아 보여. 진심으로 축하해. 아기도.”
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장난기 섞인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네 아이가 커서, 엄마 젊었을 때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으면 꼭 얘기해줘. 엄청 멋진 사람이었고, 그때 엄청 유명한 작가 한 명이 엄마를 그렇게 쫓아다닐 정도로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윤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현우는 그녀가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잠시 기다려주었다.
“그 빛나던 시절에 너랑 함께해서 정말 행복했고, 고마웠어. 그래서 내 삶은… 후회가 없어.”
현우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더없이 평온했다.
“아, 이왕 이렇게 만나서 말인데… 이 이야기의 끝을 어떻게 내면 좋을까? 너한테 한번 물어보고 싶었어.”
그것은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존중이자, 가장 깊은 신뢰의 표현이었다.
하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현우가 평생 무엇을 꿈꿔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현실에서 결코 가질 수 없게 된 것이 무엇인지도.
그녀는 눈물 젖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더없이 다정하고 단단한 음성으로 말했다.
“현우야. 이야기 속 현우는… 당신이 평생 꿈꿨던 가정을, 다른 누군가와 행복하게 꾸리는 모습으로 끝내면 어떨까?”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자, 가장 깊은 사랑의 표현이었다. 당신의 삶이, 비록 현실에서는 비극으로 끝날지라도, 당신의 이야기 속에서만큼은 가장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기를 바란다는.
현우는 대답 대신, 아주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했던 모든 시간을 조용히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