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1998년 7월 13일

by msg


"우리는 나날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들을 기억한다."
- 체사레 파베세 (Cesare Pavese)


2025년 5월 21일, 늦은 밤.


도시의 소음이 멀게 들려오는 사무실에 박진태 대표는 홀로 앉아 있었다. ‘탁’. 현우가 보낸 원고의 마지막 장을 덮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자신이 현우를 익명으로 도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밝힌 뒤, 그는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대체 왜 그렇게 작가 강현우가 눈에 밟혔는지.


그는 위스키 잔을 들어 한 모금 넘겼다. 쓴 액체가 목을 타고 흐르자, 잊고 있던 과거의 한 장면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원고의 모든 문장이, 그의 가장 깊은 곳에 남은 흉터를 날카롭게 헤집고 있었다.


1998년 7월 13일, 여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대학가의 낡은 다방.


스물넷의 진태는 맞은편에 앉은 연인, 선아의 앞에 놓인 두꺼운 수험서를 보고 있었다. '7급 공무원 행정법 총론'. 며칠 전, 그녀는 불안정한 연극배우의 길을 접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진태 씨, 나도 당신 마음 알아. 하지만… 나 이제 지쳤어. 언제까지 이렇게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그래서, 결국 포기하겠다는 거야? 네가 그토록 원했던 무대를, 그렇게 쉽게?" 진태의 목소리에는 실망감이 묻어 있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영화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온갖 수업을 들으며 막연하게 스펙을 쌓고 있을 뿐인데, 선아는 '배우'라는 선명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꿈을 동경했다. 그런데 그녀가 스스로 그 빛을 꺼버리려 하고 있었다.


"결코 쉽지 않았어. 나도 무대에 오르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매일 밤 울고 고민했어." 선아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근데 진태 씨, 나는 당신처럼 강하지 못해.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안정적인 직장에서 월급 받고, 주말에는 같이 영화 보고…. 더 이상 오디션에 떨어지고,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하는 삶은 자신이 없어."


"그 평범함 때문에 네 자신을 버리겠다고? 그건 비겁한 변명이야. 내가 부러워했던 네 꿈은 딱 그 정도였던 거야!?"


그의 오만한 말이 선아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이 찻잔 위로 툭, 떨어졌다. 그는 애써 외면했다. 그녀의 불안이, 자신이 동경하던 순수한 꿈을 더럽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무너졌다. 진태는 몇 달간 폐인처럼 지냈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잠이 들기 일쑤였고, 닥치는 대로 시나리오를 썼지만 완성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때 그의 곁을 지켜준 것은 친구 준영이었다.

어느 날 밤, 준영은 진태의 작은 자취방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야, 너 언제까지 이럴래. 선아 씨 힘든 거 뻔히 알면서, 네가 더 상처 줬잖아. 알아?"


"내가 뭘."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네 갈 길 가라고." 단호하지만 상냥한 목소리로 준영이 말했다.


"뭐 어떻게 내 갈 길을 가.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는데."


"슬슬 잡아. 잘하는 거 하면 되잖아. 너, 사실 네가 만드는 것보다 남의 글 보는 눈이 더 정확한 거 알아? 넌 최고의 감독감은 아닐지 몰라도, 최고의 안목을 가졌어. 네가 좋다고 한 시나리오는 결국 다 성공했잖아."


준영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진태 역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자신이 창작의 고통보다는, 좋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서 더 큰 희열을 느낀다는 것을.


"생각해봐. 너는 꿈이 뭔데? 그냥 막연하게 영화감독? 선아 씨는 적어도 '안정'이라는 자기 길을 찾으려고 발버둥이라도 쳤지. 너는 뭐였는데? 그냥 이것저것 찔러보면서 대학 생활 즐기던 어린애 아니었냐고. 그런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 사람을 비난해."


준영의 직설적인 말에 진태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손에 든 소주잔이 텅 비어 있었지만, 그는 그저 빈 잔만 내려다보았다. 선아의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의 미숙함. 그 죄책감이 그의 목을 졸랐다.


"투자사 같은 데는 생각 안 해봤냐? 네 그 안목으로 좋은 작품에 투자하고,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다리를 놔주는 일. 그것도 영화를 사랑하는 방식이야. 네가 진짜 잘하는 건, 창작이 아니라 '발견'이라고."


준영의 제안은 진태의 인생 항로를 바꿨다. 그는 영화 수업 대신 경영학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작은 투자사에 신입으로 입사해 현장을 배웠고, 몇 년 뒤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건 작은 영화사 '드림캐쳐'를 차렸다.


과거의 잔상이 흩어지고, 진태는 다시 2025년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손에 든 위스키 잔이 차갑게 느껴졌다. 현우가 쓴 글은, 단순히 한 젊은이의 실연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오만과 미숙함에 대한, 20년 늦게 도착한 답장과도 같았다.


현우의 글을 통해, 진태는 비로소 과거를 제대로 돌이켜볼 기회를 얻었다. 유복한 환경 덕에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자신. 꿈보다 안정을 택한 선아를 이해하지 못했던 오만함. 그는 현우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그리고 현우가 잃어버린 하윤에게서는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던 선아의 모습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환경적으로나 감정적으로는 하윤에게 더 깊이 이입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손끝에서 바스락거리는 오래된 인화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빛바랜 사진 속, 풋풋했던 자신과 선아, 그리고 준영이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 지금의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행복한 결혼 생활. 진태는 지금의 삶에 누구보다 만족했다. 이제 그는 한 사람의 꿈이 현실의 무게 앞에서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해주는 '안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안다.


만약 지금의 내가 스물넷의 그를 만난다면, 선아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해줬을 것이다.


'괜찮아, 다른 길을 가도 너는 여전히 빛나는 사람이야'라고.


'그때 내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그녀의 불안을 보듬어줄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상처만 가득한 끝은 아니었을 텐데.’


“사람은 결국 기억으로만 남는다.” 현우의 글 속 한 문장이 떠올랐다.


후회는 언제나 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는 사진을 다시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현우의 원고를 가만히 쓸어보았다. 이 젊은 작가를 향한 관심은 이제 단순한 재능에 대한 흥미를 넘어섰다. 그의 글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보았고, 그의 아픔에 깊이 공감했다. 선아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을, 그는 이제 이 젊은 작가에게 해주고 싶었다.


이 재능 있는 젊은이가, 자신과 똑같은 후회의 길을 걷게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의 마지막 꿈만큼은 온전히 피워낼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그것은 단순한 조력자나 제작자의 역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되지 못했던, 그리고 현우에게 지금 가장 필요할 ‘어른’이 되어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적어도 이 젊은이는, 나처럼 후회하게 만들지는 말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의 도시 야경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불빛들이, 마치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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