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목적은 사물의 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내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2027년 9월 7일
화려한 조명이 터져 나오는 포토월 앞,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별처럼 터졌다. 2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마침내 세상에 공개되는 영화, '내 식대로의 마지막'의 시사회 날이었다.
하윤은 낯선 향수 냄새와 웅성거림으로 어지러운 극장 로비 한편에서, 조금은 낯선 소음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윤민과 나희, 현우의 어머니와 현수, 그리고 박진태 대표와 이준영 감독까지. 현우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모두가 그의 빈자리를 채우듯 모여 있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극장 안, 거대한 스크린만이 유일하게 빛났다. 영화가 시작되고, 스크린 위로 낯익은 풍경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벚꽃 흩날리던 캠퍼스, 땀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과방, 함께 떠났던 바다. 하윤은 자신의 20대가, 현우의 시선으로 재구성된 채 타인의 기억이 되어가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스크린 속 젊은 배우들은 그들이 나눴던 대사를 읊고, 그들이 지었던 표정을 따라 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현우만이 담아낼 수 있었던, 자신조차 잊고 있던 미세한 떨림과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흘렀다.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어느 주말 오후의 거실, 현우를 연기한 배우가 환하게 웃으며 아내와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는 아이들이 꺄르르 웃으며 달려와 아빠의 다리에 매달렸다.
완벽하게 조율된 행복의 풍경. 그가 평생 꿈꿨지만, 현실에서는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객석 한가운데에 앉아있던 하윤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슬픔과 평온함이 뒤섞인 기묘한 미소를 띤 채, 그녀는 2년 전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회상: 현우가 떠난 후, 2025년 9월 10일
현우와의 마지막 만남이 있었던 찻집의 온기가 채 가시기 전이었다. 하윤에게 걸려온 윤민의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애써 추슬렀지만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누나… 현우… 갔어.”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윤민은 울음을 삼키며, 현우의 마지막에 대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그 대본만 붙들고 있었어. 더는 펜을 쥘 힘도 없어서, 그냥 가슴 위에 올려놓고… 그렇게…. 대본 맨 마지막 장에다 그렇게 써놨더라.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며칠 뒤, 윤민이 다시 그녀에게 연락했다. 현우의 유작이 된 시나리오의 마무리를 위해, 그의 뜻을 온전히 아는 하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했다. 현우의 마지막 부탁 중 하나였다고, 윤민은 덧붙였다.
“나는 꼭 현우의 마지막을… 누나가 완성시켜 줬으면 해.”
하윤은 깊은 고민 끝에 박 대표와 이 감독을 만났다. 그들은 현우가 남긴 마지막 메모 뭉치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 삐뚤빼뚤하지만 선명한 현우의 글씨체. 그리고 그 속에는 하윤이 그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 결말은… 강작가가 아니라 하윤 씨께서 직접 제안해주신 거라고 들었습니다.”
하윤은 현우의 글씨 위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네. 제가 제안했고, 그 사람이… 현우가 그렇게 끝내고 싶다고 했어요.”
그렇게 하윤은 현우의 마지막 대본을 위한 여정에 동참하기로 했다.
마지막 촬영 현장
익숙한 듯 낯선 촬영 현장.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로, 하윤은 윤민과 함께 감독의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장면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녀가 현우에게 선물했던, 가상의 해피엔딩이었다.
“컷! 좋습니다. 그런데… 현우 씨, 표정이 조금만 더….” 이 감독이 잠시 말을 멈추고 하윤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 이야기의 진짜 결말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하윤 씨, 현우라면 여기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하윤은 눈을 감았다. 마지막 찻집에서, 자신의 제안을 듣고 희미하게 웃던 현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의 평온함, 그리고 자신의 삶에는 없었던 미래를 바라보는 아련함이 담긴 그 미소.
“아마… 그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거예요. 모든 걸 얻은 사람의 미소이면서 동시에, 이 모든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의 슬픔도 담겨 있었을 거예요. 아주 옅게….”
그녀의 조언에 따라, 배우의 얼굴 위로 복잡하고도 깊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감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케이! 컷! 이걸로 가겠습니다! 촬영 종료합니다!”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란 속에서, 하윤은 조용히 모니터 속 현우의 마지막 미소를 바라보았다.
다시, 영화 시사회
어디선가 시작된 박수 소리가 극장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박수가 시작된 지점에 소정이 슬픔과 자랑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현우가 마지막으로 보낸 시나리오집을 꽉 쥐었다.
스크린 속, 현우의 분신이 이루어낸 행복한 가정을 보며, 그녀는 아주 잠시 그 곁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슬픈 상상이었지만, 현우가 꿈꿨던 행복이, 비록 허구일지라도 스크린 위에서 영원히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스크린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각본 강현우. 그 아래로 각색 채하윤, 안윤민 이라는 이름이 뒤따랐다. 윤민은 이름이 나오자 이제 만 2살이 된 딸을 번쩍 안아 올리며 나희에게 해맑게 자신의 이름을 가리켰다. 나희는 그런 윤민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극장 안의 불이 서서히 켜졌다. 사람들의 벅찬 감상평이 웅성거림이 되어 귓가를 스쳤다. 현우의 어머니는 곱게 접은 손수건으로 조용히 눈가를 훔쳤다. 어느새 늠름한 청년이 된 현수가 그런 어머니의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
“엄마, 형 멋있지?”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는 스크린 속 성공한 작가가 아닌, 자신의 낡은 일기장을 보고 꿈을 키웠던 어린 아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너도 아빠도 이걸 같이 봤어야 했는데….’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슬픔 끝에 작은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아들의 마지막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으니.
현수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안다는 듯, 더 꽉 어깨를 안았다. “형도 하늘에서 아빠랑 같이 보고 있을 거야. 뿌듯해하면서.”
로비 한편, 박 대표는 창밖을 보며 준영에게 말했다. “봤지? 내 안목. 내가 강작가 이번 작품은 꼭 성공할 거라고 했잖아.”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호탕했지만, 눈가는 붉게 젖어 있었다.
이준영 감독이 대답했다. “그 자리에 올 사람을, 미리 알아본 거지.”
둘은 웃다가, 말없이 스크린이 있던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윤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여전히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만약… 당신이 아프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신은 얼마나 더 대단한 작가가 되었을까. 아니, 어쩌면 작가가 아닌, 오늘 영화에서처럼 아이들과 함께 웃는 평범한 아빠가 되었을까.’
그녀의 생각은 슬픔을 넘어, 한 사람의 빛났던 삶에 대한 깊은 존경과 그리움으로 향했다. 스크린 속에서, 현우는 영원히 행복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행복은, 그들이 함께했던 모든 시간의 끝에서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었던 마지막 안녕이었다.
그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남겨진 모두의 첫 문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