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내가 바로 그 강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몇 해가 흘렀다. 계절이 수없이 제자리를 돌고, 세상은 그만큼의 속도로 변해갔다. 맑은 가을 햇살이 거실 깊숙이 들어오던 오후, 하윤은 서재 한편에 꽂힌 낡은 시나리오집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손끝에 익숙한 책등의 감촉이 느껴졌다. 표지에는 닳아빠진 글씨로 '내 식대로의 마지막' 이라고 쓰여 있었다. 책장을 넘기자, 익숙한 잉크 냄새와 함께 그날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2025년 9월 10일.
현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며칠 뒤였다. 윤민은 현우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윤에게 연락했다. 약속 장소는 두 사람의 연애가 시작되었던 대학가의 작은 카페였다. 창가 자리에 앉은 하윤의 맞은편에는, 친구를 잃은 슬픔에 어깨가 작게 무너져 내린 윤민이 있었다.
“누나… 현우가, 마지막으로 누나한테 꼭 여기서 전해달라고 한 말이 있어.”
윤민은 떨리는 손으로 작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건… 현우가 누나한테 남긴 말 그대로야. 나보고 꼭… 그대로 읽어달라고 하더라.”
윤민이 숨을 깊게 고르고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애써 담담했지만, 모든 음절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첫 마디를 내뱉는 순간, 하윤은 눈을 감았다. 목소리는 분명 윤민의 것이었지만, 그가 고른 단어, 문장의 호흡, 그 안에 담긴 서툰 진심은… 온전히 현우의 것이었다.
“사실… 이 순간을 수없이 상상했어.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그런데 막상 이렇게 마주 앉으니까, 아무 생각도 안 나네.”
윤민의 목소리를 통해, 현우의 마지막 말이 이어졌다. 하윤의 결혼 생활과 아이에 대한 축복, 그들의 빛나던 시절에 대한 감사, 그리고 후회 없다는 고백까지. 현우가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이, 카페의 쌉쌀한 커피 향과 함께 하윤에게 스며들었다. 마지막으로 윤민이, 아니, 현우가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이야기의 끝을 어떻게 내면 좋을까? 너한테 한번 물어보고 싶었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하윤은 눈앞의 현우를, 그리고 그의 너머에 있는 윤민을 보았다. 이것이 그가 그녀에게 건네는 마지막 대화였다. 그녀는 목이 메는 것을 참고, 윤민의 붉어진 눈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지막 선물이 될 대답을 건넸다.
“그 사람 이야기 속에서만큼은… 당신이 평생 꿈꿨던 가정을, 다른 누군가와 행복하게 꾸리는 모습으로 끝내달라고… 그렇게 전해줘.”
이야기를 다 들은 하윤은 윤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현우가 시작한 서사의 결말을 함께하겠다고.
다시 현재.
현우가 남긴 ‘마지막 대본’은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의 조각들이 모여 완성되었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 이야기를 완성한 것은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하윤은 그의 의도를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는 ‘감수자’가 되어 이 감독과 밤을 새워 편집을 논했다.
윤민은 박 대표와 함께 제작의 모든 과정을 지키며, 친구의 마지막 꿈이 왜곡되지 않도록 싸웠다. 현우의 편지와 시나리오집을 받은 소정은, 이야기 속 작은 고증 오류 하나를 발견해 제작진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윤은 시나리오집의 마지막 페이지를 쓸었다. 그곳에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글로 새겨져 있었다.
S#78. 현우의 집 거실 (주말 오후)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 현우(35), 아내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춘다.
그 주변으로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퍼져나간다.
모든 것을 얻은 남자의 미소, 그 위로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자의 옅은 슬픔이 함께 어린다.
그는 더없이 행복하다.
“엄마, 뭐해?”
작은 아이의 목소리에 하윤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시나리오집을 덮고 아이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아니, 그냥… 아주 용감했던 한 작가의 마지막 이야기를 읽고 있었어.”
그녀는 책을 서재에 다시 꽂아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에 앉아, 낡은 만년필을 쥐었다. 현우, 그의 삶은 끝났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남아 세상의 어딘가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노트의 첫 장을 열었다. 빈 종이 위로 그녀 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가 남긴 이야기 덕분에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에 남긴 가장 완벽한 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