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간이란 없다. 미래 또한 없다. 있는 것은 다만 현재뿐이며, 그것은 영원한 현재다."
- 조이스 캐럴 오츠 (Joyce Carol Oates)
하윤은 책을 서재에 다시 꽂아두었다. 현우가 남긴 이야기는 그렇게 세상에 남아 계속해서 읽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의 진짜 마지막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찻집에서 윤민을 통해 그의 마지막 목소리를 전해 듣기 몇 해 전, 그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던 그날의 기억.
회상: 2023년 겨울, 하윤의 결혼식
순백의 웨딩드레스, 수많은 하객들의 축복, 단상 위에서 맹세를 나누던 순간.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던 하윤은, 문득 1년 전 남편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현우와 헤어진 후, 그녀는 긴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별생각 없이 맞선에 나갔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그녀처럼 억지로 끌려 나온 듯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머니께서 한 시간은 꼭 채우고 오라고 하셔서요.”
그의 솔직한 고백에, 하윤은 처음으로 긴장을 풀고 웃었다. “저도요. 저희 어머니는 사진까지 찍어오라고 하셨어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결혼'이라는 압박을 가하는 부모님 밑에서 억눌려온 지난 세월에 대해 이야기하며 깊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는 그녀의 과거에 대해 깊이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한번은 하윤이 현우와의 관계를 포함한 자신의 과거와 상처, 그리고 길을 잃은 듯한 현재의 불안감을 두서없이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지 자책하며 이야기를 마쳤다. 현우였다면, 그 이야기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더 나은 서사'를 위한 해결책을 제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 조용히 말했다.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저 그 한마디. 판단도, 분석도, 해결책도 없는 담백한 위로. 그 순간, 하윤은 마치 오랫동안 짊어져 온 무거운 갑옷을 내려놓는 듯한 깊은 평온함을 느꼈다.
그는 그녀의 불안정한 모습을 재촉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녀의 속도를 기다려주었다.
'치열한 영감'이 아닌 '안정적인 지지'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음을 깨닫고 결혼을 결심했다. 그것은 그녀가 비로소 자신의 행복의 기준을 스스로 정립했음을 의미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현우가 보아주기를 바랐다.
그가 더 이상 자신 때문에 아파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는 직접 윤민의 편에 그에게 청첩장을 보냈다.
와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알려주고 싶었다.
남편의 손을 잡고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돌아섰을 때, 수많은 하객들의 축복과 웅성거림 속에서, 그녀는 기적처럼 그를 발견했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 가장 먼 기둥 뒤에 위태롭게 서 있는 현우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수척해진 모습. 마치 세상의 모든 빛을 흡수해버린 검은 코트처럼, 그는 홀로 서 있었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가 정말 와주었다는 안도감, 미안함,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심장을 찔렀다.
그때, 현우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괜찮아,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아주 옅은 미소와 함께. 그의 눈은 슬펐지만, 더없이 맑았다.
그 순간, 하윤은 깨달았다. 이것이 그의 방식대로 전하는 마지막 응답이라는 것을. 그녀는 옆에 선 남편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오직 한 사람을 향해 웃어 보였다.
‘나도 괜찮아. 나 이제 정말 괜찮으니까, 당신도 부디 평안하기를.’
그 미소는 수많은 축복의 빛 속에 섞여 그에게로 날아갔다. 얼굴 한번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말 한마디 섞지 못했지만, 그 어떤 대화보다도 더 많은 의미를 담았던 마지막 순간.
식이 모두 끝나고, 신부 대기실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로 온 짧은 문자 한 통.
‘오늘 정말 예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현우였다. 하윤은 저도 모르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식장을 빠져나가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그녀에게 보낸 진짜 마지막 인사였다. 소리도, 얼굴도 없는, 그러나 그 어떤 말보다도 무겁고 진실된 마지막 문장.
하윤은 그 문자를 지우지 못하고, 아주 오랫동안 간직했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짧았지만, 가장 완벽했던 연서(戀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