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심지어 과거는 지나가지도 않았다."
- 윌리엄 포크너 (William Faulkner)
2025년 5월 7일
드림캐쳐 영화사 회의실의 공기는 무거우면서도 진지한 열기로 가득했다. 박진태 대표와 이준영 감독은 방금 읽기를 마친 현우의 원고 뭉치를 앞에 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각본의 마지막 문장이 남긴 아릿한 여운이 방 안을 맴돌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박 대표였다.
“하… 강 작가님. 정말… 대단하네요.” 그는 안경을 벗어 눈가를 꾹 눌렀다.
“한 남자의 20대를 이렇게 잔잔하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야기로 풀어냈네요. 마지막에 소정이라는 친구가 문을 열어주는 것 같아서 겨우 숨을 좀 쉬었는데, 그 둘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반면 이 감독은 냉철한 분석가의 눈으로 원고를 다시 훑었다. “서사 구조상으로는 완벽한 지점에서 끊으셨습니다. 한 편의 비극적인 연애담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었죠. 그런데….”
그는 현우를 바라보았다. “작가님도 그래서 저희를 부르신 거겠죠? ‘그래서 그 남자는 어떻게 됐는가’에 대한 질문이 남았으니까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 그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맞습니다. 제 20대의 가장 큰 이야기는 하윤과의 만남과 이별로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제 삶은, 그리고 이 대본은 아직 끝나지 않았죠. 이 뒤에 이어질 20대 후반부터 서른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담아내야 할지 막막합니다. 자칫 독자들이 몰입해온 감정선을 해치는 사족(蛇足)이 될까 봐서요.”
두 사람은 현우의 고민에 깊이 공감했다. 이 감독이 턱을 괴며 말했다. “기술적으로는 소정과 이어질 가능성을 암시하며 끝내는 게 가장 깔끔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작품의 시작점이었던 ‘죽음을 앞둔 작가의 마지막 기록’이라는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박 대표가 거들었다. “이 감독 말에 동감합니다. 이건 그냥 사랑 얘기가 아니잖습니까. 강현우라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지. 관객들은 현우가 어떻게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지금 이 글을 쓰게 됐는지, 그 과정을 보고 싶어 할 겁니다.”
“우선 드릴 말씀이 있는데, 소정과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현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 30살까지의 현우로 글을 마무리한다면, 꼭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좀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박 대표가 물었다.
“세 가지입니다.” 현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첫째, 제가 제 완전한 죽음까지 글로 담아낼 자신이 없습니다. 둘째,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각자의 삶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싶습니다.”
숨이 차올랐는지 심호흡을 한 현우가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의 실제 당사자들에게 제 메시지가 한정된 의미로 전달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게 자신들의 이야기인 것을 어렴풋이 알 테니까요.”
세 사람의 토론은 길어졌다. 한참의 고민 끝에 박 대표가 결론을 내리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합시다. 30살까지의 이야기를 가져가되, 압축적으로 가는 겁니다. 이별 후 2년간의 공백기와 작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는 모습, 그리고… 병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핵심적인 에피소드 위주로 재구성하는 거죠.”
그것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현우는 두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이제 그의 어깨 위에는,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온 자신의 20대 후반을 어떻게 재단하고 압축해서 마지막 대본에 담아낼 것인가 하는 무거운 과제가 남았다.
그 주 주말, 현우는 사촌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왁자지껄한 축복의 소음 속에서 턱시도를 입은 사촌 동생과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보니, 문득 잊고 있던 기억의 한 조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23년 가을, 윤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야, 현우야. 너 혹시… 들었냐?”
“뭘?”
“하윤 누나… 올겨울에 결혼한대.”
“……그래?”
“누나가… 네 것도 나한테 맡겼는데 시간 될 때…….”
청첩장에 대한 이야기 같았지만, 그 뒤의 말들은 현우의 귀에 닿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수화기 너머 윤민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소음처럼 멀어졌다. 1년 넘게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던 그녀였다. 이제는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시간은 흘러 겨울이 되었고, 윤민에게서 받아온 청첩장은 그의 책상 한편에서 닳아갔다. 그는 매일같이 그것을 손에 쥐었다. 차가운 종이의 모서리가 무뎌지고, 흰 종이가 손때에 절어 누렇게 변하고, 정갈했던 글씨가 번져갈 때까지.
‘하윤이는 왜 나한테 청첩장을 보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이 나질 않았다.
그는 결국 하윤의 결혼식장을 찾았다.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그저 멀리서나마 그녀가 행복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조용히 축의금만 전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왜 청첩장을 보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녀를 마주하면 얌전히 돌아설 수 없을 것을 알았다.
북적이는 하객들 틈에 섞여 들어간 결혼식장은 눈부시게 밝았다. 은은한 꽃향기와 사람들의 들뜬 말소리가 공기를 채웠다. 그리고 단상 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으로 서 있는 하윤과 그 옆에 선 듬직한 신랑이 보였다.
주변 하객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신랑 진짜 훤칠하다. 변호사라더니… 집안도 대대로 법관 집안이래.”
그 말을 듣는 순간,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깔끔한 얼굴에 키가 크고, 안정적인 직업에, 훌륭한 집안. 하윤의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완벽한 조건의 남자였다. 신랑은 하윤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었고, 그 미소를 받는 하윤의 얼굴에는 현우와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현우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조용히 축의금을 접수대에 맡기고 소란스러운 식장을 빠져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칼날 같은 겨울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신은 얼음물에 씻은 듯 선명해졌다.
하윤이 남긴 마지막 말, ‘현우야, 너랑 있으면 내가 엄청 잘못 살고 있는 사람 같아.’ 그 한마디의 무게로 몇 년간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그 차가운 공기 속에 비로소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길게 참아왔던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안심’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행복이 그의 구원이었다. 더 이상 자신이 그녀의 불행의 원인이 아니라는 해방감. 어쩌면 이것이 그녀가 자신에게 보낸 청첩장의 진짜 의미이자, 현우에게 찾아온 마지막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들이마신 차가운 공기가 속에서 피어나는 안심으로 데워지는 것을 느끼며, 이제 온전히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온 현우는 의식처럼 컴퓨터를 켰다. 하얀 모니터 불빛이 어두운 방을 밝혔다. 그는 다시, 온전히 자신의 세계에 들어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