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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Oct 24. 2021

낡은 옷

짧은 이야기

초조한 고요가 작은 시골 마을의 오후를 자욱하게 덮고 있었다. 로라는 혼자 먹을 스튜를 만들기 위해 작은 감자 몇 알을 손질했다. 불과 3달 전만 하더라도 그 정도의 양은 해리와 함께 먹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이제는 요리가 남아서 다음 끼니때도 먹는 일이 많아졌다. 결혼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신혼부부인 로라와 해리는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목공소에서 처음 만났다. 해리는 그곳에서 일하는 인부들 중에서도 가장 키가 크고 어깨가 아주 넓은 편이었다. 목공소에서는 주로 북부 영국 노섬벌랜드에 있는 산지로부터 운송된 나무를 받는데 그 나무들은 속이 탄탄하고 가격이 저렴한 반면 크기나 모양이 제각각이라서 반드시 초벌 작업을 해야만 했다. 톱질을 하고 도끼로 큰 가지를 쳐내는 작업 중에 가장 힘이 많이 드는 일은 늘 해리의 몫이었다. 아무리 그런 몸과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해리는 정말 많이 먹기는 했다. 해리가 두 사람이 함께 앉은 식탁에서 먼저 그릇을 비우고 나면 로라는 해리, 조금 더 들 거예요? 하고 묻는데 해리는 늘 ‘남은 게 있으면 더 줄래요?’ 하고 말하곤 했다. 해리는 로라가 늘 요리를 조금 더 만들어서 해리가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것은 몰랐다. 그래도 해리가 ‘그럼 조금만’ 하면서 무던히 웃을 때 로라는 함께 웃었다. 


두 사람은 특별할 것 없는 요리를 곁들인 비슷한 대화를 하면서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를 누릴 줄 아는 사람에게도 전쟁은 찾아왔다. 반년 전 나치 독일의 선전포고와 함께 추축국과 연합군이 전선을 끝없이 늘려 그리는 동안 영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징집되었다. 매일 아침 시장이 서는 광장이나 마을에 하나뿐인 성당과 약품점 벽마다 조국이 당신을 원한다는 내용의 벽보가 붙어있었다. 포스터 문구 중에는 여러분의 어머니와 아이들이 말한다. 부름에 응하라고.라는 내용도 있었으나, 실상 마을에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다. 해리를 포함한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10여 일 만에 거의 모두 징집되어서 나치 독일의 유보트 잠수함에 대치한 남쪽 해안 전선으로 떠났다. 그들은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기 전에 보이지 않는 적들과 대치해야 했다. 로라와 같이 남겨진 여인들은 낮에는 떠난 이들을 대신해서 공장을 돌리고, 가축을 먹이고, 몇몇 티가 나지 않는 고귀한 일들은 한 후에야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감히 무언가를 가꾸기에는 좋지 않은 때였다. 정신없이 낮이 지나고 나면 밤에는 과연 당사자에게 도착하는지 알 수 없는 편지를 썼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그들은 저마다 불빛에 그을린 벽을 쳐다보았다. 불빛이 아무리 오랫동안 벽을 비추어도 그 너머는 어두웠다.


움푹한 그릇에 감자가 쓸데없이 넘치게 담기는 사이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로라는 깜짝 놀라서 작은 칼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아마도 최근에 마을에 퍼진 죽음의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문처럼 퍼진 사실 때문에 마을에 전운과 같은 불편한 고요가 감돌고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나서 최근 3개월 이후에 전쟁은 전 방위적이고 무차별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도형을 만들 수 없는 전선에서 시도 때도 없이 셀 수 없는 사상자가 나왔다. 모두에게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전쟁은 체력전이기도 하였으므로 연방 정부는 징병으로 인한 생산량 차질과 급증하는 전사자가 불러올 수 있는 사회 혼란을 막고자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징병된 자들을 대신해서 그들이 일하는 자리에 여성들이 일자리를 갖게 되었고, 라디오를 통해서 정치인들의 희망찬 연설과 승리를 확신하는 전쟁 영웅의 인터뷰들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얼마나 그 목소리를 믿고 싶었던지 그런 것들은 정말로 효과가 있어서 남겨진 사람들은 불빛 없는 겨울을 버티고 있었다. 정부의 그러한 눈속임의 일환으로 생긴 것이 통지 대리인 제도였다. 그들은 전국 각지로 보내져서 전사자의 유가족에게 사망 사실을 공식적으로 통보하고 사망확인서에 서명을 받는 한편 전사자가 가지고 있던 물품을 전해주도록 했다. 대리인들은 각 지방정부에서 파견되었기 때문에 방문한 지역과는 전혀 다른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거의 반드시 검은색과 흰색의 옷이나 장신구를 입었는데 검은 블라우스를 입으면 흰 코트를 입고, 검은 코트를 입으면 흰 장갑을 끼는 식이었다. 마을 성당에 30년이나 있던 수녀의 입에서 죽음과 천사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에 얻게 된 신뢰성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들의 외양 때문에 이름이 거부감 없이 정착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때때로 그들이 실수로 흰색 장갑을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통보해야 할 한 주간의 사망자 명단이 있는 장부는 반드시 소지하고 다녔다. 물론 그 점이 사람들이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였다. 게다가 천사들은 한 달 전부터는 로라가 사는 마을에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방문을 겉으로는 먼발치에서 애써 무시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다가올 까 봐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는데 그건 사람들이 평생 동안 죽음에 대처하는 모양이기도 했다. 로라가 노크 소리에도 온몸이 쭈뼛이 서 버린 건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해리의 소식이 누구보다 궁금했지만 그게 마지막 소식은 아니었다. 

로라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온통 검은 옷에 흰색 테두리가 눈앞에 퍼졌다. 그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동공이 확장되고 시야는 아득해졌지만 다행히 아니었다. 성당의 아멜리아 수녀는 로라에게 남부 전선으로 보낼 편지를 받아 들고 나서 천사들이 로라의 집에도 왔었는지 물었다. 로라가 고개를 저으니 아멜리아는 몸을 숙이며 말했다.


“요즘 그들이 한밤 중에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집의 출입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대요” 로라의 눈이 다시 커졌을 때 아멜리아는 말을 이었다. “그들이 다음에 죽을 사람들의 집을 미리 점찍어 둔다는 거래요. 어쩌면 그들이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운이 다해버린 건 아닐까요” “아멜리아 수녀님, 그런 얘기를 믿으세요?” “아니요, 다만 요즘엔 그런 이야기마저…..” 로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되자 낮에 들었던 이야기가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로라는 불빛 없는 어두운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을 두 사람에 대해서 상상했다. 두드러진 검은 옷과 유난히 하얀 얼굴에 짙은 입술을 바른 두 사람을. 이미 죽기로 예정된 사람의 집을 미리 알아두는 두 사람을. 어쩌면 라디오에서 말하는 기적적인 승리를 위해 몇몇 장군의 머릿속에서 이미 죽었을 것이 명백한 사람들의 명단이 모두 반영된 장부를 유심히 살펴보는 두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현실에서는 별 다른 일이 없다면 상상이 무언가를 지배하는 일이 허락될 것이었다. 그들의 검은 옷이 달빛을 먹으면서 한동안은 빛이 들지 않을 것임을 상기시켰다. 로라는 하얀 장갑을 낀 어두운 코트의 두 사람이 마을의 곳곳을 다니면서 무력한 문을 두드리는 것을 떠올렸다. 그들이 가는 곳은 죽음이 가본 길을 따라가는 것과 같아서 시선이 길을 잃어도 목적지를 놓치는 법은 없었다. 로라는 방향이 맞는다면 언젠가는 닿을 것이라는 사랑과 죽음의 원칙에 대해서 생각했다. 로라는 단지 해리가 보고 싶었다. 조금 엇갈린 인연이 언젠가 만나고, 오래 기다릴수록 비가 반드시 기도에 응하듯이 멀리 떨어진 채 바라본 두 개의 점이 꼭 하나처럼 붙어있는 것처럼 이미 벌어진 죽음과 곧 벌어질 죽음은 그들에게 차이가 없어 보였다. 문을 두드리는 두 사람은 그것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멋대로 뒤늦은 주의와 설익은 위로를 건네고 있을 것이리라 로라는 생각했다. 그들이 알려주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들의 기도가 뒤늦게 도착한 곳에 대해서, 그들이 통보받기 전에 죽은 누군가의 말없는 기다림에 대해서 로라는 생각했다. 작은 사람들에게는 너무 넓은 세계에서 조금 엇갈린 진실이 배반으로 해석되는 것과 이미 늦었다는 이야기를 자꾸만 충실히 알리는 일을 오래전부터 별들이 하고 있었다.


로라가 꿈꾸는 듯이 상념에 빠져 있다가 깨어난 것은 그녀가 집 앞에서 알 수 없는 인기척을 느낀 후였다. 밖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이미 어둠이 아침에게 잠시 자리를 빌려주려 하는 이른 아침이었다. 로라는 잠들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더 이상 분노하지도 감사하지도 않았다. 현관문을 이룬 플라나리아 나무 결을 따라서 로라가 있는 집 안으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무는 오래전에 베였지만 무늬에는 소리가 담겼다. 그 소리는 여전히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했으며, 갑작스러웠다. 로라는 노크가 원하는 바를 알았다. 천사가 갈만한 곳 중에서 해리의 집을 방문했을 뿐이었다. 


죽음은 무섭고 천사는 성스러웠으리라. 게다가 그것이 함께 다녀갔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섭거나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을 만큼 성스러울 일은 없었다고 나무는 말하는 것 같았다. 시간은 로라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녹록지 않았다. 로라는 해리를 닮은 일레인이 보라색 제비꽃이 듬성듬성 이 피어있는 작은 초원을 뛰노는 것을 바라보며, 그날 천사가 고백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언젠가 로라는 해리가 정말로 언제쯤 돌아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일레인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알고 싶지 않아요.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소중한 것들을 낡은 옷처럼 구석에 던져두고 싶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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