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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Dec 31. 2021

두 세계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리뷰 

눈이 펑-펑 내려 하얗게 잠기는 길을 바라보며 나는 언젠가 지금처럼 눈길을 빼앗겼던 순간들에 대해 생각한다. 첫사랑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몰라, 초조했던 스무살의 나는 얼굴이 하얀 여자들의 옆모습을 곁눈질로 쳐다보곤 했다. 내가 바라본 찰나의 순간마다 마음이 술렁거렸으므로 나는 곧 만나게 된 진짜 첫사랑과 그들을 매번 혼동(混同)한 셈이었다.


몇번의 연애를 거치며 나는 이전과는 다른 것들을 혼동하게 되었다. 가령 집착과 관심, 권태와 안정, 할 말과 한 말, 당신이라고 생각한 것과 당신, 나 라고 생각한 것과 진짜 나. 요약하자면 이별과 만남에 대해서 그러했다. 그 후로 나는 거리에서 지나간 연인들을 닮은 사람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고개가 돌아가는 시간동안 착각했다가 앞을 보면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러면 그들과 헤어져 길을 걷는 지금의 나와 그들과 손을 잡고 길을 걷던 내가 동시에 있었다.


경하는 학살에 대한 책을 쓴 후로 악몽에 시달린다. “마치 몸이 절반으로 갈라지듯 모든 사적인 순간들에까지 책의 그림자가 어른거려” 경하는 꿈과 생시를 혼동하게 된다. 그런 경하에게 인선은 절단 사고를 당한 제주도 본가에 하나 남은 새(아마)를 구해달라고 한다. 경하는 마치 꿈속에서 본 검은 나무들의 무덤이 썰물에게 빼앗긴 유골을 찾듯이 “어떤 것도 발광하지 않는 해저면” 같은 인선의 집으로 향한다. 하룻밤 사이 눈에 잠길 그 여정은 분열과 혼동 속에서 어디로 가려 하나?


1부 [새]에서 유언을 고쳐 쓰던 경하는 새를 살리러 온 자신이 정작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라고 깨닫는다. 2부 [밤]에서 경하는 온통 혼동스러운 것들 사이에 있다. 경하는 분열된 혼과 생명을 (양쪽의 인선, 아마), 서로 다른 사람을 (인선의 엄마와 정류장 할머니), 관계를 (친언니 인선), 시간을 (“인선의 옆얼굴이 아이 같다고, 동시에 눈 덮인 머리칼이 완전히 센 은발처럼 보이기도 했다”) 혼동한다.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내리는 눈과 혼동속에서 인선은 촛불을 밝힌 경하에게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건의 끔찍한 증언들을 들려준다. 그 기록에는 평생 외삼촌을 찾아 헤매던 엄마의 일생이 재가되어 담겨 있다. “하나의 눈송이가 태어나려면 극미세한 먼지나 재의 입자가 필요”하므로 작중에 내리는 눈과 닿는 일은 곧 피맺힌 증언들 안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따라서 둘의 대화는 절단된 손가락(아마도 겪은 자와 겪지 않은 자들의 단절일)이 끊기지 않도록 계속 환부를 찌르는 일이면서, 또한 인선이 ‘지나치게 잘 안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마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 


혼동이 가득 찬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은” 이유는 인선의 엄마가 평생 실톱처럼 깔고 잠든 하나의 혼동 때문이다. 그녀는 아마도 벌어졌을 사실과 혹시나 일어나기를 바란 가능성 사이를 혼동한다.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견딜 수 있는 방법은 "두 개의 상태에 그날 밤의 오빠가 동시에 있게 된" 하나의 혼동뿐이다. 우리가 그것을 깨달을 때 혼동은 오히려, 아니 오로지, “극진한 사랑”과 삶으로부터 “작별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갈수록 삶은 그다지 명료해지지 않는다. 나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을 혼동한다. 지금 나의 눈길을 빼앗는 것은 과거나 미래의 연인이 아니라 지긋한 어르신들이다. 경하가 정류장에서 인선의 죽은 엄마를 만났다고 여겼듯이, 나는 그들에게서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본다. 어쩌면 그건 시간과 바람이 우리에게 해 놓는 일들이 꽤 비슷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초를 밝혀 기꺼이 그 혼동에 참여한다. 


엄마는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는 이유로 도로변 길바닥에 심어진 나무 같은 할머니에게 반쯤 언 나물을 몽땅 사곤 했다. 내가 그걸 처음 보았을 때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어렸으므로 엄마도 ‘자그마한 몸 전체에서 생기가 배어나오던 여자’였을 것이다. 엄마가 그녀와 작별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돌아본다. 이 소설에 유난히 그 말이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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