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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발 Dec 20. 2021

나와의 싸움

<나와 싸우고 있는 나. 구경하는 고양이> 


흔히 '자신과의 싸움'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들이 그 과정을 설명할 때 쓰는 표현이다. 그런 이들이 벌인 자신과의 싸움담을 듣거나, 보고 있으면 그 치열함에 절로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10년 전,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사진이 공개된 적이 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스스로를 이기기 위한 과정은 싸움을 넘어 전쟁에 이르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강수진의 발에는 전쟁의 잔혹한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발가락과 발등의 관절은 대부분 옹이처럼 툭툭 불거져있고, 발톱은 피멍이 들어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하고자 하는 것, 해야 하는 것을 그냥 한다는 것. 그것이 고통스럽고, 괴롭더라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가 벌이는 '자신과의 싸움'은 주로 일상생활에서 벌어진다. 귀찮음과 귀찮음이 부딪힐 때, 무엇을 하려는 나와 그것을 말리는 나. 무엇을 미루는 나와 그것을 다그치는 나는 아주 사소한 영역에서 투닥댄다. 청소, 설거지, 빨래 등 '그냥 하면 되는데, 바로 하기 싫은 것'이 주로 화근이 된다.


20년 전, 독립하고 나서 깨닫게 된 게 두 가지 있다. 살림에 쓰이는 노동력과 시간이 어마어마하다는 것과 그것을 제대로 해내기엔 내가 너무 게으르다는 것. 나는 반복적인 일을 싫어하는데 살림은 필연적으로 무한반복이라 한때는 고통스럽기도 했다. '신화 속 시지프스가 신을 기만한 죄로 영생토록 돌을 굴리는 형벌을 받았다면, 이번 생의 나는 죽도록 살림을 하는 벌을 받는구나.'라고 오바육바할 만큼 싫었다. 


그중에서도 설거지는 강적이었다. 먹을 때야 좋지, 먹고 나면 지저분한 그릇도 보기 싫고, 손에 물 닿는 것도 싫고, 설거지와 관련된 모든 행위가 싫었다. 그래서 개수대에 쌓여있는 컵이며 그릇만 보면 짜증이 난 적도 있다. 집안의 모든 컵과 그릇을 다 쓰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설거지를 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개수대 쪽은 늘 산만하고, 보기만 해도 심란했다. 한 친구는 내 한탄을 들으면서 식기세척기를 사면 되지 않느냐, 했지만 집이 좁아서 식기세척기를 놓을 만한 공간이 없었다.


한 번은 설거지 거리를 앞에 두고 한숨을 쉬다가 이런 식의 감정소비는 미련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고, 계속해야 하는 일인데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하자. 먹고 나면 바로 하자. 습관이 들면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며칠 반짝했다 말았다 하고, 개수대에 층층이 쌓인 그릇을 외면하고 지나가는 나를 보며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했다. '다그치는 나'를 만든(?) 것이다. 설거지가 하기 싫어서 뭉그적 댄다 싶으면 반사적으로 '다그치는 나'를 불러내 '미루는 내'가 설거지를 하게 만들었다. '다그치는 나'가 '일어 나. 어서 해. 5분이면 끝나. 하고 나서 놀아.' 이 정도의 말을 속으로 두어 번 반복하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현타가 오기도 하고, '그냥 빨리 하자' 싶어서 설거지를 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바보 놀음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강제성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나에게는 제법 효과가 있었다. 인격 분리(?) 요법이 먹히면서 여러 분야에 써먹기 시작했다. 살림살이는 물론 일할 때도 적용했다. 주로 귀찮은 일에 효과가 좋았다.  


그런데 약에도 내성이 생기듯, 인격 분리 요법에도 내성이 생길 때가 있다. 얼마 전부터 집에서 맨몸 운동을 시작했는데 보름이 지나고부터 슬슬 나와 내가 싸우기 시작한다. '다그치는 내'가 뭐라고 해도 '미루는 내'가 꼼짝을 안 한다. 어제는 내가 나를 설득할 말을 찾다가 갑자기 애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스스로 한심해졌다. 오늘, 반드시, 운동을 하겠다는 다짐으로 이 글을 적고 있다. 이거 쓸 시간에 운동은 하고도 남았겠지만, '미루는 내'가 보라고 남겨둔다.


그냥 해.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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