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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재 Jan 28. 2022

당신보다 그것이 좋아

놀라는 놀라의 것


제목을 읽은 사람들이 '뭐야, 브런치에 이런 야한 글을 올리겠다고?'라고 말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다행일지 실망 일지 모르겠지만 이건 넷플릭스 <She's gotta have it(그녀는 그걸 가져야 해)>이라는 묘하면서도 영 애매한 외국 드라마의 제목을, 성인이라면 안 눌러볼 수가 없도록 <당신보다 그것이 좋아>라고 바꾼 담당자의 능력일 뿐이다.



대체 당신보다 뭐가 더 좋다는 건지 대부분 짐작 가는 것들이 있을 테지만 이 드라마를 다 보고 나면 'it(그것)'에는 야한 것만 들어가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 놀라 달링(Nola Darling)은 아주 매력적이고도 프로페셔널한 여성 아티스트다. 이 드라마는 1986년에 만들어진 흑백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데, 원작에서는 크게 조명되지 못했던 놀라의 예술가로서의 모습이 많아서 내러티브적으로 훨씬 재미가 있다. 놀라는 회화예술을 하는 아티스트인데, 특히 흑인과 여성을 주제로 자신을 표현하는 작업을 사랑한다. 그래서 놀라는 아마 당신보다 붓이/아름다움이/예술이/놀라가 더 좋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인생에 섹스는 절대 빠질 수 없는 키워드다. 어쨋튼 이 드라마는 19금이니까.





<당신보다 그것이 좋아>는 한 마디로 에너지가 좋은 작품이다. 흑인, 예술, 여성, 연대, 사랑, 우정, 영감, 자유 같은 단어들이 마구 떠오른다. 놀라는 전혀 다른 성향의 세 남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다. 아니, 어쩌면 애인보다는 섹스 파트너에 더 가까울 것 같다. 놀라는 그중 누구에게도 규정되거나 소유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I can only do it in my own bed.(나는 내 침대에서만 할 수 있어.)'

그런 그녀는 절대로 다른 누군가의 침대에서 섹스를 하는 법이 없다. 하지만 사실 놀라에게 그런 구분은 잠시 고민해볼 정도의 거리도 되지 않는다. 그녀는 삶을 사랑하느라 바쁘다.



이 드라마의 시즌 2 에피소드 7화에서 놀라는 친구들과 푸에르토리코에 후원금을 전달하기 위해 방문한다. 거기서 그녀의 남자 중 한 명인 마스의 어머니를 만나 밥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장면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다. 예술가로서 방향성을 잃은 놀라는 그녀에게 울컥한 눈동자로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러자 그녀는 놀라에게 담담히 말한다.



'Let your spirits hold the map.’
(지도는 너의 정령이 쥐게 해라.)
‘How do I hear from them though?’
(그들의 말을 어떻게 듣죠?)
‘They're your convictions, so serve them.’
(그들은 너의 신념이다, 그러니 섬겨라.)



사람들은 저마다 좌절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현실에 치여 도저히 마음이 되살아나지 않을 때면 우주를 떠올린다. 우주의 단위에서는 나와 이 현실의 문제가 먼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에겐 놀라와 그녀의 대화가 비슷한 역할을 해준다. 수많은 지혜로운 죽은 사람들, 그들의 정령이 나의 신념과 함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푸에르토리코에서 그곳의 주민들이 젬베(djembe)를 연주하며 다 같이 자신의 흥에 취해 마구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처음 볼 때 놀라가 질투 날 정도로 부러웠다. 내가 지금 어떤 모양새의 춤을 추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며 유별나고 엉뚱한 움직임으로 춤을 출 수 있는 몸. 그런 몸은 대체 어떻게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놀라는 독수리 같다. 그녀의 자유로움은 취약하지 않고 강인하다. 시즌 1에서 오팔(Opal)이라는 플로리스트 여성을 만나는데, 그 흐름이 어찌나 완만한지 우리가 자리 잡고 앉아서 정체성에 대해 골몰하고 토론하는 모습이 우스워질 정도다. 앞서 이야기한 원작 흑백 필름에서는 놀라가 자신을 좋아하는 여성을 거부하는 이야기로 나오는데, 2017 버전에서 그녀들은 뜨겁게 현실적으로 사랑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주인공 놀라를 연기하는 이 배우의 이름은 드완다 와이즈(DeWanda Wise)이다. 이 작품에 좋아하는 몇몇 장면이 많지만 <당신보다 그것이 좋아>를 막연히 떠올리면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하는 놀라 달링의 눈동자만이 떠오른다. 드완다 와이즈는 놀라 달링의 눈동자를 가졌다. 이렇게 놀라를 완벽하게 연기한 미친 눈동자의 그녀와, 독특하고 실험적인 연출로 스토리의 매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스파이크 리 감독의 재능에 기립 박수를 보낸다. 놀라의 삶이 이끄는 데로 시즌 1, 2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녀의 용기가 마음에 옮아 있다. 그리고 어떤 세상을 상상하게 된다. 모두가 제 멋대로의 옷과 머리를 하고 말도 안 되는 움직임으로 젬베 연주에 춤을 출 수 있는 그런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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