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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재 Dec 15. 2021

어디를 겨냥할 것인가

선과 평등의 화살로


분노하지 않는 인간은 거짓이다. 분노하지 않으면 공감할 수도 없다. 특히 누군가를 위해 분노한다는 것은 이타성의 실현이며, 여기엔 공감성과 자기 확신이라는 건강한 자아가 필요하다. 그래서 자아가 작거나 비대한 사람은 타인을 위해 분노할 수 없다. '그럴 수 있지'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실과 거리두기를 하며 자신을 보호하는 이들은 결국 어떤 것에도 영감 받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럴 수 있지를 쉽게 내뱉는 사람 치고 그럴 수 없는 일을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내가 분노의 힘을 믿는 이유는 슬픔과 달리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위 '분노의 화살'이라는 말을 쓰듯이, 분노가 서린 말은 누군가를 찌른다. 그래서 거기에는 세심하고 선한 본성이 단단히 받쳐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의 본성이 담긴 분노가, 혐오와 이기심의 화살이 되지 않으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한가. 일단, 뱉어내기 전에 나의 분노를 물건 보듯 바라보며 잘못 이어진 가닥을 찾아보자.



잘못 이어진 가닥이란 단순하게 말하자면, 상황의 책임자를 잘못 찾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실수를 자주 한다. 나도 모르게 학습한 혐오와 이기심이 본성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향성을 보면, 상황의 맥락과 논리와는 별개로 잘못의 책임자를 쉽게 여성으로 지목한다. 그 예시를 구구절절 늘어놓을 수 있겠지만, 잠재적 가해자 담론이 가장 명징한 이슈이다. 최근 성폭력, 성추행 등에 '여성 혐오 범죄'라는 명명이 시작되며 뭇 남성들은 본인이 잠재적 가해자 취급받는 것에 분노한다. 물론 분노할 만한 일이다. 아무런 악의 없이 살아가는 '나'에게 잠재적 범죄자라는 오명을 씌우니,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내가 생각해도, 남성들은 자신이 그런 취급을 당하게 한 여성 혐오 범죄 가해자 남성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들 것 같다. 그런데 웬 걸. 나는 그들의 과녁을 헛짚었다. 처음엔 이 맥락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는데, 억울한 남성들의 분노가 겨냥한 것은 당황스럽게도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압도적 비율로 한쪽 성이 피해자가 되는 여성 혐오 범죄의 팩트가 있다. 그런데 그 팩트를 마주한 여성이 남성을 경계하게 되는 현상의 책임이 돌고 돌아 여성에게 내려앉은 것이다. 여기서 실제 가해자 남성의 책임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재적 가해자를 둘러싼 일부 남성들의 겨냥은 잘못돼도 아주 단단히 잘못되었다. 장막을 걷어내고 사실을 보자.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 취급받는 것은 여성을 때리고 죽이는 여성 혐오 범죄 가해자 남성들 때문이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겨냥을 똑바로 하자.



사실 위와 같은 개인의 판단을 문제 삼기 전에  제도에서부터 화살이 잘못 겨냥되고 있는데, 그중 여성 피해자 비율이 98% 이상인 강간죄가 심각하게 편향되어있다.  사법부는 폭행, 협박을 당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강간죄를 적용하고 있다. 그런데 폭행과 협박의 인정에 대해서  겨냥이 남성이 아닌 여성을 향해있다. 가해자가 어떤 의도로, 어떤 행동을, 어떤 위계로 했는지가 아니라 피해자가 얼만큼, 어떻게 거부했는지에 판결의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거부 의사를 표현하고, 가해자를 밀쳐내고, 장소를 벗어려는 정도로는 피해자가 '제대로', '가해자가 이해하도록' 거부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사법부는 지금껏 중립적이었던 관점을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아주 여성주의적인 태도로 환원하는 고난을 겪을 필요가 있겠다. 어떤 사안에서든 여성을 겨냥하고 잘못의 책임을 지우는 간단함을 너무 오래 반복했다. 사실 가해자는 남성인 사건에도 여성을 준가해자의 위치쯤에 내려두는 태도를 취했으니 말이다. 이럴  뱉는 '  똑같아'라는 말은 얼마나 손쉬운 말인가.



불과 같은 감정이기 때문에 분노는 쉽게 없어진다. 하지만, 타오르고 남은 재는 오랜 시간 살아 있고, 거기엔 그 사람의 본성이 들어있다. 그래서 어떤 이슈에 분노해서 그것을 표현할 때, 혐오와 이기심의 표현이 되지 않도록 잘 확인해봐야 하겠다. 선한 분노를 하고 있는가, 화살이 잘못된 과녁을 맞히고 있진 않은가 등을 말이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뱉은 분노가 헛발이었다면 다음 발에서는 제대로 된 겨냥을 해보자. 나를 지키는 분노가 아니라 남을 위한 분노는 불꽃처럼 탄다. 선과 평등으로 제대로 된 책임자의 잘못에 맞출 때 화살은 완벽히 날아가 꽂힌다. 불꽃의 에너지로 올바른 과녁을 향해 분노를 쏘자. 타고 남는 것들이 나동그라지는 더러운 것들이 아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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