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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재 Mar 17. 2022

환란의 세대

가난과 죽음의 사랑 노래


브런치 매거진 <나직한 얼굴들>의 기획 의도는 나와 다른 얼굴을 가진 이들의 나직한 눈과 귀와 목소리를 담은 좋은 이야기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 얼굴들은 크게 떠들어 본적이, 공평하게 보이고 들려진 적이 없어 역사를 나직이 보내왔다. 영화나 드라마, 책을 통해서 긴 호흡으로 천천히 이야기들을 따라가는 것도 매력적인 체험이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항상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는 역시 음악일 것이다. 자리 잡고 앉지 않아도 언제든 길에서까지 즐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소개할 음악은 부디 자리 잡고 앉아서 가삿말에 감각을 집중하면서 들어보길 바란다. 음악과 비주얼 연출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아름다운 영상으로 감상하는 것도 좋다. 뮤즈스 [MUZES]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다.



출처. 뮤즈스 [MUZES]



주변에서 잘 모르는 남다른 재능과 매력을 가진 아티스트를 발견하는 건 언제나 신나는 일이다. 그런 순간에 과하게 열광하고 속절없이 빠져버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그게 나다. 그 역사를 따라가 보자면 지금은 메가 슈퍼스타가 되어 어디 가서 팬이라고 말하기도 구태의연한 빌리 아일리쉬가 있고 노래와 비주얼의 합, 그리고 애티튜드에 반해버린 새소년과 황소윤이 있고 비교적 최근에 사랑에 빠져 아직 그 물 안에서 맛보고 즐기고 있는 '이랑'이 있다.



이랑의 작업에 담겨있는 메시지에 나는 말 그대로 취향을 저격당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감정선과 분위기는 (적어도 나 같은) 청자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창작이란, 아이디어가 독특하거나 표현법이 독특하거나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만 하기도 어렵고 그걸 또 잘 해내기란 더 어렵다. 그런데 이랑은 둘 다 한다. 그녀에게 아티스트로서 명예를 안겨준 <늑대가 나타났다>라는 3집 앨범이 그 증거다. 타이틀곡 <늑대가 나타났다>는 가난의 노래다. 가난한 사람들이 일으키는 이 혁명의 노래는 이랑이 박근혜 탄핵 시위를 떠올리며 데모할 때 울릴만한 노래를 만들고자 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사실 가난은 아주 차갑게 식은 장판 같은 것이다. 떠는 몸으로 이불속을 비집고 들어가도 방 안을 꿉꿉하게 채운 찬 공기를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어떤 불행보다도 가난은 온도가 필요한 것 같다. 아니 절실하다. 그런데 <늑대가 나타났다>에서 노래하는 가난은 춥지 않다. 따뜻하다 못해 뜨겁기도 하다. 그건 1월 23일 <늑대가 나타났다> 무대를 봐도 알 수 있듯 이랑의 노래 안에는 사람들과 사랑이 있고 그것이 체온을 만들기 때문일 테다.



이랑의 3집 앨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다름 아닌 <환란의 세대>다. 사실 이랑이 6년 전에 작곡하고 이번 앨범에 수록된 <잘 듣고 있어요>가 내 마음속 명곡이었는데 고속버스에 몸을 맡긴 하룻밤이 <환란의 세대>를 진짜 듣게 해 줬고 사랑에 빠지게 했다. 아래에 이 노래의 마지막 벌스 가사를 옮겨 적었다. 울부짖듯 가창하는 이 가삿말은 합창단 '아는 언니들' 피처링 버전으로 들어보길 추천한다.



우리가 먼저 죽게 되면-
일도  해도 되고 돈도 없어도 되고 울지 않아도 되고 헤어지지 않아도 되고 만나지 않아도 되고 편지도  써도 되고 메일도  보내도 되고 메일도  읽어도 되고
목도  메도 되고 불에  타도 되고 물에  빠져도 되고 손목도  그어도 되고
약도 한꺼번에 엄청 많이  먹어도 되고
한꺼번에   가버리는 멸망일 테니까
- - 아아 너무 좋다
- - 아아 깔끔하다



사람마다 예술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나의 경우는 아티스트에 대해서 연도별 인터뷰, (혹시 출간했다면) 책, 데뷔 작품 등 그 인물을 공부하듯 즐긴다. 작품들은 아티스트가 가진 얼굴들이다. 작품의 의미를 본인만의 해석으로 즐기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티스트의 관점과 의도를 연구하듯 즐기는 방법의 좋은 점은 그 인물의 얼굴이, 즉 그 시선이 나와 하나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2017 한국 대중음악상, 트로피를 파는 퍼포먼스의 이랑

 



같이 죽어버리자는 노래를 부르는 이랑이 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인지 처음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저기로 실어지는 어둑한 밤에 불확실한 삶과 영원히 싸우며 살아야 할 내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우울이 찾아왔다. 그런 날이 있다. 잠에서 일어나 밥을 먹고 몸을 씻고 사람들과 말하는 일들을 내일도, 내일모레도, 10년, 40년 뒤에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무거워질 때가. 그럴 때면 인간의 운명이란 평생 무거운 바위를 옮겨야 하는 형벌에 처한 시시포스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게 죽기 전까지 매일 떨어지는 바위에 대한 자세한 두려움들이 만들어 내는 심연으로 쭉- 내려간다. 가본 사람만 아는, 그곳에서 살아갈 방법을 도모할 순 있어도 빠져나올 수는 없는.



이랑의 목소리가 에어팟 넘어 들린다. 죽어버리자. 그럼 돈도 없어도 되고. 울지 않아도 되고. 만나지 않아도 되고. (내 마음대로 더 작사해보자면) 웃지 않아도 되고 맞아 죽지 않아도 되고. 머리가 개운해졌다. 잘 살아보기 위해서 바위를 깎아도 보고 근육을 키워도 보고 바위에 맞아 죽기 전까지 깔려도 보다가 그래도 도저히 나아지지 않으면 그래, 죽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우리에겐 언젠가 죽음에게 씌워진 오해를 풀어줘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마치 20세기 성해방 이후가 돼서야 인간에게 성이 표현 가능해지고 자유롭게 누릴 것이 된 것처럼 죽음에도 해방이 필요할지 모른다. 죽음, 혹은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두려워하고 금기시하는 것은 곧 옛말이 될 거다. 그리고 주머니에 죽음을 끼고 다니는 그런 미래의 인간은 더 가볍고 경쾌하게 살 테다. 삶이 덧없어서 다행이라며.



이랑의 얼굴을 내 얼굴처럼 느끼며 배웠던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사랑이었다. 공과 사, 자연과 인간, 이성과 감성 같은 모든 이분법을 해체하고 있는 우리는 왜 여전히 죽음을 오해하고 있나. 이 이상으로 그녀가 가진 좋은 이야기는 보통의 사람과 자신의 직업적 소명까지도 닿는다. 좋은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것이 좋은 이야기인지 참 정의하기 어려운 주제다만, 살아있는 동안 각자 자신 밖의 것들을 위한 이야기 하나는 갖고 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든다. 돈이 없어서, 장애가 있어서, 나이가 너무 어려서, 많아서, 여성이라서 등등 역사적으로 만들어온 추접한 우월감 따위에  숨 쉬듯 죽어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이랑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는 것과 죽는 것, 차별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닿았다. 나직이 역사를 지나온 얼굴들에 대해 현대에 들어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건 이런 좋은 이야기들 덕일 것이다. 그럼 이랑의 2집 앨범 <신의 놀이>의 가사를 옮겨 적으면서 글을 마무리하겠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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