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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재 Nov 13. 2021

너를 전적으로 사랑하고 싶어

비독점적으로 사랑하기


'간통은 오직 결혼 자체가 사라져야만 사라질 수 있다.' 페미니즘의 바이블, 『제2의 성』의 한 문장이다. 아무래도 바람과 간통이란 형태의 인간의 사랑은 초역사적인 사실인가 보다. 심지어 2세기 전에는 결혼과 사랑을 결부하여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 외에 연인을 따로 두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바람피우는 기혼자 혹은 연인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이건 우리 시대의 통념이다. 연애 고민을 토로하는 무수한 프로그램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배신한 사람을 미워한다. 다 같이.



그러면 모든 인간은 통념대로 살아가는가? 보부아르는 '사랑은 어느 시대나 제도와 법에 맞서 자기를 주장해왔다.'라고 적었다. 자유로워진 인간은 이제 자신의 영혼, 내재성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지 않는다. 보편에 반(反)한 죄목으로 외계인, 별종으로 낙인찍혀도 말이다.



그리고 여기 동시대 사람 대다수의 미움과 의심의 눈초리를 한껏 받는 사랑, 폴리아모리가 있다. 폴리아모리는 말 그대로 많은(poly) 사랑(amor)이다. 한국어로는 다자 연애, 다자간 연애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한국어 해석에는 오해의 여지가 다분하다. 사실 폴리아모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수는 중요하지 않다. 요점은 연애의 방식이 상대방을 향하여 독점적이냐 비독점적이냐에 있다. 실제로 비독점적으로 한 사람만을 만나는 폴리아모리스트들도 있다. 이 폴리아모리의 대척점에는 현시대 대다수가 공유하는 사랑의 방식인, 모노가미, 모노아모리라 불리는 1대 1 연애방식이 존재한다.



『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를 읽기 1년 전, 나는 2년 동안의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내 삶에서 작아진 설렘과 즐거움의 감정들에 지속적인 결핍을 느꼈다. 그래서 그것을 채워줘야 마땅한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연인에게 더 의지하고 요구했다. 그러나 결국 그 결핍은 그가 채워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다른 사람'도' 만나고 싶었다. 연인에게 권태를 느끼거나 어떤 일이 생긴 건 아니었다. 그때 나는 나의 연인을 온 마음으로 사랑했으며 우리 사이에 문제는 없었다.



그 시기에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남자는 대화도 그닥 잘 통하지 않았고 외적으로도 그닥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운 관계만이 채워줄 수 있는 결핍을 그 사람은 채워줄 수 있었다. 그 '그닥'스러운 사람과는 2개월도 채 만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때문에 2년 간의 연애는 끝났다. 그 이별은 정말 길고 요란스럽고 뜨겁고 질척했다. 폴리아모리를 지향하는 지금이었다면 그와 다른 결말을 맺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만나고 싶다는 그 마음에 대한 우리가 아는 선택지는 이별밖에 없었다.



이별을 하면서 '앞으로 몇 년 동안 연애를 하지 않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리라.' 다짐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연애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전포고를 했다. 그중 사랑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자신의 '여자 친구'로 삼을 수 없다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고 또 힘든 이별을 겪었다. 그리고 얼마 뒤, 폴리아모리를 알게 되었다.



무한대의 사랑, 폴리아모리 심볼



정의(定義)는 큰 힘을 가진다.『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는 나에게 거대한 정의의 힘을 느끼게 했다. 2년 간 연애를 끝내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느꼈던 결핍과 의문의 덩어리에 이름이 붙여졌다. 왜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는가? 왜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를 구속하고 싶어 하는가? 이 질문에 논리적으로 답변할 수는 없다. 왜냐면, 모노아모리 이데올로기는 근거 없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법과 제도는 인간이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지만 모노가미가 인간을 더 잘 살아가게 하는 사랑의 형태인지는 모르겠다.



모노아모리에는 필연적으로 상대방을 독점하고 싶어 하는 통제의 본성이 스며들어 있다. 모노아모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 설렘, 감동,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모노아모리는 연인을 사랑한다. 연인이 나만을 사랑한다는 전제하에서만. 나를 제외한 누군가에게 행복, 설렘, 감동, 즐거움을 느끼면 내 연인은 순식간에 남보다도 못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타인의 삶, 특히 감정을 절대 독점할 수 없다. 과연 모노아모리가 인간을 더 잘 살아가게 하는가?



『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는 다양한 폴리아모리스트의 삶을 보여준다. 폴리아모리를 잘하고 있는 사람, 폴리아모리 때문에 힘든 사람, 폴리아모리가 궁금한 사람 등 다양하다. 폴리아모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전적으로 사랑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행복함을 느끼는 연인을 사랑으로 바라본다. 그 사람이 좋은 것을 느끼는 순간을 함께한다. 다른 사랑의 가능성을 이해하면서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독점하지 않는다. 감히 말하건대, 폴리아모리는 사랑의 본질에 더 가깝다. 2년 간 연애의 종지부쯤 지지 부지한 이별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을 정말 똑같이 느낀 이 책의 한 사례가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남성이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건넨 반쯤 젖어 있는 노트의 글이다.



자유롭고 싶어, 너를 전적으로 사랑하고 싶어, 그래서 내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그 일을 너에게 걸리지 않을까 긴장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중략), 하지만 너는 내게 최고의 존재였으면 좋겠어, 네가 내게 불행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흔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비독점적으로 다양한 사람을 만났던 시기에 나는 가장 변화했다. 누군가와도 사랑을 경험할 수 있고 설렘, 즐거움 같은 좋은 것을 나눌 수 있음은 나를 더 자유롭게 움직이게 했다. 지금도 나에게 그런 가능성과 자유로움의 감각은 아주 중요하다.



앞서 말했듯이 폴리아모리는 만나는 사람의 수가 아닌, 비독점적 연애 방식의 지향이기 때문에 사랑의 당사자들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과 모습이 다르다. 그래서 비독점적 연애 방식은 라이프스타일이고, 선택의 영역이다. 지금껏 폴리아모리를 바람둥이 정도로 생각해온 사람들은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적어도 모노아모리가 수반하는 소유와 독점의 연애 방식에 조금은 환기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마침내 독점하지 않는 사랑을 이해하게 된다면 나와 나의 연인의 삶에 더 많은 사랑과 자유를 더해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한순간에 나의 억압과 불행이 되지 않고, 사랑인 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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