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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재 Apr 06. 2022

빛이 있으라


인간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난자와 정자가 만나 어쩌고저쩌고 하면 인간이 만들어진다. 우린 그걸 이제 초음파를 통해 눈으로도 본다. 그럼 지구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무의 공간에서 거대한 질량이 모여 뻥! 하더니 우주가 생겼고 엄청난 시간 후에 지구가 생겼다. 그래 그렇지, 인간과 지구는 그렇게 생겨난 것들이다. 이 질문과 사실들은 제법 간단해 보이고 명쾌하기까지 하다. 21세기가 과학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이유는 이런 명쾌함 때문일 것이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웬만해서는) 반박 불가.



그것에 비하면 인문학, 사회과학은 참 애매하고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가 싶기도 하다. 이건 이거다, 반박 불가. 이런 건 사회과학에 없다. 어떤 하나의 주장에 대해 알아보려면 기웃거려야 할 학자들이 여기저기 쫌 많은 게 아니다. 하지만 철학이나 사회과학이 인기가 없어졌다 해도 여전히 우리 사회를 과학만큼이나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감히 확신한다. 특히 그놈의 포스트모던! 소리가 나오는 이 포스트모던은 철학뿐만 아니라 예술, 심지어 과학 지식에도(!) 대단한 영향을 줬지 않은가.



포스트모던이 마치 접두어로 '그놈의'가 붙는 이유는 여태껏 인간 사회가 만들어온 모든 질서와 규칙에 대해서 '왜??? 왜 그래야 하는데???'를 마구 붙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든 도덕과 윤리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깨끗이 쓸려 나가고 국가와 민족도 쓸려 나가고 결국 나와 너도 쓸려 나간다. 그러면 뭐가 남나. 아무것도 없음이 남는다. 아무것도 없음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아무것도 채우고 있지 않은 내 머릿속이 남는다. 섬뜩해진다. 80억 인간은 여기 있는데, '인간다움'이 없으면 그들은 대체 무어라 말인가. 그러면 곧 인간이 만들어 온, 평소엔 갑갑하다 생각했을지도 모를 질서와 규칙에 매달리고 싶어 진다. 돌아와 달라고.



그러나 진리는 없다. 80억 명이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그런 문장이 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각자의 문장을 안고 살아가는 시대다. 과거엔 누군가의 진리를 모두에게 강압적으로 주입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실제로 다수가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대엔 진리가 없다. 그것이 허구라는 걸 이제 누가 모르는가. 우리가 알던 본질과 진리는 이제 모두 도마 위에 오를 수 있다. 결혼이든 출산이든 교육이든 돈이든, 뭐든 잘게 썰릴 준비가 되어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숲을 지키는 전지전능한 신, '사슴신'이 나오는데, 이 사슴신은 누군가에게서 생명을 뺏기도, 주기도 할 수 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사슴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려도 우리가 감히 내다볼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보통 생각한다. 얼마나 속 편한 생각인가. 나는 무교이기 때문에 종교인들이 자신의 모든 공과 실수를 그분의 뜻이겠거니 생각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사슴신을 보고 깨닫게 됐다. 그 사고방식이 주는 대단한 평안과 진취성을. 종교든 신이든 모두를 떠나서 '그래, 이렇게 된 이유가 있겠지' 여기에 '그 이유는 대단한 진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이유일 테니까'가 더해지면 엄청난 평안과 더불어 바로 그다음 스텝으로 갈 수 있는 진취력이 뒤따라오지 않겠는가. 그래서 사슴신이 그 지엄하신 결정을 사실 카카오톡 제비뽑기로 한다 한들 우리들이 그 결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ok, 그다음 할 수 있으면 그걸로 사슴신은 제 할 일을 다 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아쉽게도 세상엔 사슴신이 없고 종교가 없는 사람도 많으니 우리는 규칙과 질서를 믿으며 살 수밖에 없다. 국가적 제도에 문제의식과 회의를 품고 사는 사람으로서 나도 둘째가라면 서럽지만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이것들이 다 허물어진다고 상상하면 그것보다 두려운 건 없을 것이다. 그래도 눈 질끈 감고 인간다움 없는 인간들의 세상을 한번 상상해본다면,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맨 처음으로 '빛이 있으라'를 명한 것처럼 나도 무엇인가의 가호를 받으며 이렇게 명하겠다. '(카카오톡으로 제비뽑기를 하는) 사슴신이 있으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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