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스는 전형적인 영국의 작은 시골마을이다.
넓은 들판에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놀고 있었다.
우중충하고 변덕스러운 영국의 날씨와 달리 하늘이 높고 맑았다.
요환과 셀레나는 작은 오솔길을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고 광활한 요크셔 들판은 잠시나마 요환에게 평안을 선물했다.
엄청난 일들이 요 며칠 사이에 전부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지금도 눈을 감았다 뜨면 모든 것이 꿈일 것만 같았다.
캐서린.
그녀 역시도 꿈에서 깨면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의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지금 그는 이전과 다른 진실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가 블랙홀을 통한 시간여행을 하려고 한 것도, 처음부터 신에 대한 증오와 도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를 현실로 끌어 잡아주고 있는 것은 진실에 대한 갈망이었다.
바벨의 후예의 비밀, 이들을 노리는 세력들.
그리고 캐서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그는 알아야만 했다.
요환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셀레나는 벌써 저 멀리서 홀로 걷고 있었다.
그녀는 급하게 손을 흔들며 요환을 불렀다.
“박사님! 빨리 이리로 와 봐요.”
다급한 셀레나의 외침에 요환은 정신을 차리고 그녀 쪽으로 급히 몸을 옮겼다.
셀레나는 한 노파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분께서 왓슨 박사를 잘 아신데요.”
셀레나의 말에 요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노파는 허리가 많이 굽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적어도 나이가 여든은 넘어 보였다.
“우리 동네에서 오랫동안 지냈다면 스캇을 모를 수가 없지. 그는 이 마을의 자랑이거든.”
“할머니께서는 왓슨 박사와 어떤 사이세요?”
“어릴 적부터 우리 옆집에 살던 아이였지. 이런 시골 마을에서 위대한 박사님이 태어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노파는 거동이 불편한 듯 손을 부르르 떨었다.
요환은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
“할머니, 아직도 왓슨 박사의 생가가 이곳에 있나요?”
“그렇지. 우리 집 바로 옆집이라네. 저기 언덕 위에 있는 빨간 지붕 보이지? 거기가 바로 스캇의 집이야. 그 옆으로 또 저만치에 작은 집이 바로 우리 집이라네.”
“왓슨 박사의 가족들이 아직 그곳에 살고 있나요?”
“암, 그렇고말고. 부모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여동생이 아직도 그 집에서 살고 있다네. 그리고 보름 전인가 오랜만에 스캇이 고향에 찾아왔었다지?”
“왓슨 박사님이 이곳에 다녀갔다고요?”
요환이 깜짝 놀라 말했다.
“동네 사람들이 그렇더군. 내가 마지막으로 스캇을 봤을 때는 꿈을 가진 작은 청년이었지. 그랬던 그도 이제 많이 늙었겠지? 에이 왔으면 인사라도 하고 가지. 뭐가 급하다고 코빼기도 안 보이고 그렇게 떠나버렸을까”
요환은 노파를 부축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왓슨의 여동생을 만나면 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단지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파가 가리킨 집이 가까워져 오자 집 앞 정원 뜰에 앉아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아도 중년 여성의 모습이었다.
요환은 그녀가 왓슨 박사의 여동생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언덕 위의 빨간색 지붕은 유별나게 그 주위에서 눈에 튀는 집이었다.
“누구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요환과 셀레나가 먼저 입을 열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중년 여성이 입을 열었다.
“혹시 이곳이 왓슨 박사님의 집인가요?”
요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년 여성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앉고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 집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셀레나, 할머니를 부탁해요.”
그녀의 그러한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요환은 당황해하며 빠르게 언덕 위를 올라갔다.
‘쾅’ 소리가 나며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요환은 그녀의 집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 좀 열어주세요. 저희는 왓슨 박사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요환은 다시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저는 왓슨 박사님을 꼭 만나야 합니다.”
안에서 가녀린 여성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집을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여기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보름 전에 박사님께서 이곳에 오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문을 열어주세요.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도 집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는 박사님과 함께 연구하던 사람입니다. 박사님께서 위험에 처해 있을지도 몰라요. 제가 박사님을 도울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요환의 말에 문 안에서 다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죠?”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박사님 밑에서 연구를 하던 안요환 박사입니다.”
“요환?”
요환이란 말을 듣자 문 안에서는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문이 조금 열리고 문틈으로 중년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미안해요. 안 박사님, 난 제시예요. 스캇의 여동생이죠. 그런데, 뒤에 있는 여자분은 누구죠?”
제시가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셀레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 조수 셀레나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의 조수인 셀레나 파머입니다.”
이제야 안심이 된 듯 문을 열어주었다.
요환과 셀레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제시, 지금 왓슨 박사님이 위험에 처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의 행방에 대해서 알아야 해요.”
요환의 말에 제시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처럼 보름 전쯤에 스캇이 절 찾아왔었어요. 케임브리지에 있을 때는 종종 고향을 찾던 그가 홀연 대학을 떠나고 나서는 처음으로 고향에 왔었어요.”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그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하며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다며...”
제시는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렸다.
셀레나가 자신의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제시는 셀레나가 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제시의 손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아무에게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 말라고 했어요.
하지만 요환이란 한국인이 자신을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가 제 이야기를 하던가요?”
요환이 흠칫 놀라서 물었다.
바벨의 후예를 떠난 지난 3년간 자신과 왓슨의 관계가 어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와 교류한 흔적 역시 없었다.
하지만 제시의 말을 들으니 여전히 왓슨이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도 어쩌면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어떡해요?”
제시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낄 때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휘청거렸다.
“괜찮아요. 진정하세요. 일단 저기 소파에 앉으세요.”
요환은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소파에 앉혔다.
“왜 스캇이 쫓기는 신세가 된 건가요? 그가 무슨 죄라도 저질렀나요?”
소파에 앉은 제시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런 것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말해주세요. 나는 스캇이 왜 대학을 떠났는지 그리고 그 이후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하나도 알지 못해요. 어떻게 하나뿐인 가족에게도 그걸 말해주지 않을 수가 있죠? 심지어 스캇은 우리 부모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어요. 부모님이 얼마나 스캇을 사랑하셨는데...”
제시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요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어 자초지종을 제시에게 설명해 주었다.
“세상에나...”
제시는 적지 않게 놀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제시, 왓슨 박사님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지금 우리는 시간이 없어요. 혹시 그가 누구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던가요?”
“스캇은 이곳에 온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바로 집을 떠났어요.”
제시는 보름 전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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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내리던 자정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제시는 잠에서 깼다.
처음에는 비가 내리는 소리인가 싶어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시”
그녀는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20여 년 전 홀연히 사라져 버린 자신의 유일한 오빠인 스캇의 목소리였다.
매일 밤 꿈에서 듣던 그 목소리와 똑같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제시는 급하게 현관으로 뛰쳐나가 문을 열었다.
“스캇? 정말 스캇이야?”
문 앞에는 비에 흠뻑 젖은 흰머리의 남성이 서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젊고 야망에 가득 찼던 자신의 오빠가 이제는 주름지고 머리가 하얗게 센 60대 노인이 되어 문밖에 서 있었다.
제시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 하고 그를 껴안았다.
“오! 스캇, 어디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왜 이제야 날 찾아온 거야?”
“제시, 여전하구나. 계속 나를 비 맞게 할 거야?”
그제야 제시는 왓슨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지금까지 무엇을 했냐 어떻게 지냈냐 등등 듣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왓슨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는 대신 자신이 쫓기고 있고 이게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몰라 찾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20여 년 만에 처음 본 오빠의 입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자 제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누가? 도대체 왜 오빠를 쫓는 거야?”
왓슨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에리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남겨주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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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는 내내 제시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옆에서 셀레나가 제시를 안아 주며 위로해 주었다.
요환은 셀레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편지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있었나요?”
제시는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침실로 갔다.
그리고 편지를 들고 와서 요환에게 전해주었다.
“아마 스캇은 당신이 이곳을 찾아올 줄 알고 있었나 봐요. 이건 나에게 준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전해준 거예요. 직접 읽어보세요.”
요환은 편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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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과 같은 요환에게
지금쯤이면 자네는 미래로 와 있겠지?
그럼 지난 3년간 바벨의 후예에 그리고 나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모를 거야.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네.
바벨의 후예는 자네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계속 위협을 받고 있었지.
바벨탑 위치는 발각되었고 나는 공격을 받기 전에 임시 해산 명령을 내렸다네.
우리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어.
오랜 역사동안 바벨의 후예는 공격을 받아왔지.
우리를 그 세력들을 ‘카이퍼 벨트’라고 부른다네.
그들은 자네가 떠난 직후 더욱더 우리를 거세게 압박해 왔어.
이제야 자네가 알았겠지만 그때 그곳에서 내 딸 캐서린은 죽었다네.
그리고 이제는 내 목숨까지도 노리고 있어.
자네도 위험할지 모른다네.
범인은 놀라지 말게나, 아마 헤드 마스터 중에 있는 것 같다네.
자네가 바벨의 후예에 들어오기 전부터 나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자네에게 말할 수는 없었네.
또한 내 딸을 죽인 범인은 카이퍼 벨트와 모종의 관련이 있을 수도 있지.
지금 나는 안전한 곳으로 피하려고 하니 혹시 나를 찾아 내 여동생에게 왔다면 일전에 우리가 공유했던 ‘암호’를 풀어 나를 찾아오게나.
자네라면 이미 어디인지 알고 있을 게야.
거기서 기다리고 있겠네.
P.S. 에리스를 조심하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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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환과 셀레나는 제시에게 인사를 하고 집 밖을 나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요환, 에리스란 사람은 누구일까요? 혹시 아는 사람인가요?”
셀레나가 궁금한 듯 물었다.
요환은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 이름이 아닐 거예요 아마. 카론처럼 말이죠. 에리스는 소행성 이름이에요. 카이퍼 벨트에 속한 소행성이죠.”
“카이퍼 벨트?”
“카이퍼가 발견한 소행성들의 집합이에요. 카이퍼 벨트에는 수많은 소행성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발견되면서 같은 크기의 명왕성이 행성으로서 자격을 잃게 되었죠.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에리스라는 소행성이 발견되면서 명왕성은 추방당하게 되었죠. 아마 바벨의 후예를 지하로 추방시키고 위협하는 세력을 ‘카이퍼 벨트’라고 지칭한 것 같아요. ‘에리스’는 그들과 손을 잡은 바벨의 후예 내 배신자를 뜻하고요.”
“그럼, 에리스가 아직 누구인지 모른다는 거네요?”
“일단은 왓슨 박사님도 헤드 마스터 세 명 중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우선은 박사님의 위치를 알았으니 그리로 먼저 갑시다.”
“쪽지에 왓슨 박사가 있는 곳이 적혀 있었나요?”
“뭐, 적혀있지는 않은데 어딘지 대충 감이 오네요. 빨리 갑시다. 여기서 멀지는 않지만, 비행기는 타야 할 것 같거든요.”
셀레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어디로 갈 거죠?”
“작은 보석을 찾으러요.”
요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셀레나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