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지 않았나 보군.”
스미스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혹시나 비행기가 출발하지는 않았는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공항 주위를 살피고 있는 셀레나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의 행동에서는 프로와 같은 모습과 특유의 느긋함이 묻어났다.
그에 비해 셀레나는 이제 갓 날갯짓을 시작하는 어린 새와 같은 모습이었다.
전광판에는 뉴델리행 비행기가 아직 대기 중이고, 출발이 지연되고 있다는 문구가 흘러나왔다.
“좋아.”
전광판을 확인한 셀레나는 바로 비행기 표를 사러 몸을 움직였다.
“지금 표를 사는 것이 가능한가요?”
스미스와 둘이 남겨진 요환은 그에게 물었다.
“응. 만약 없다면 만들어야지.”
스미스가 짧게 대답했다.
정말이지 이 사람하고는 그리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없는 표도 만든다는 스미스의 말에 UN이란 이름으로 그들이 과한 공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만석이라면 스미스는 누군가 세 명을 억지로라도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몇 분이 지나자 셀레나가 돌아왔다.
“관계자에게 말해놨으니 바로 탑승할 수 있을 거예요. 저희가 타면 바로 출발한다고 합니다.”
셀레나가 스미스에게 항공권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두 장의 티켓만 손에 쥐고 있었다.
“셀레나, 제 항공권은 어딨나요?”
셀레나가 스미스에게만 표를 주자 요환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스미스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요환. 당신은 여기까지예요.”
“무슨 말이죠? 의미를 잘 모르겠네요.”
셀레나는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당신은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저와 스미스만 가기로 결정했어요.”
“무슨 말씀이죠? 왜 저는 여기 있어야 하죠?”
요환을 보고 있던 스미스가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지금 크게 착각하고 있나 보군. 자네는 지금 용의자 신분이야. 바벨의 후예는 UN에게 있어서 과학자들의 집단이 아닌 테러집단으로 규명되었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셀레나를 도와준 것을 감안하여 자네는 정상참작 해줄 것이라네.”
그의 말을 듣자 요환은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날 이용한 것인가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요환”
“그럼 어째서?”
“당신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없어요. 알제이는 세계 최고의 킬러예요. 당신은 벌써 두 번씩이나 죽을 뻔했다고요. 더는 당신을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 없어요. 여기서부터는 우리의 몫이에요.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셀레나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요환에게 호소했다.
그녀는 요환이 위험에 빠지는 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함께했잖아요. 내가 도움이 되지 않았나요?”
“오, 요환.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런 것 아녜요.”
셀레나는 자신이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요환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요환을 위하는 그녀의 개인적인 감정 외에도 UN의 입장에서도 요환이 위험에 빠지는 것이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자네가 묵었던 베를린 호텔로 돌아가면 가방에 현금 삼천 달러가 있을 걸세. 우선은 그것으로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있으면 좋겠네. 혹시 돈이 모자라면 이쪽으로 연락을 하게나.”
스미스가 명함 한 장을 요환에게 내주었다.
자신을 위하는 셀레나의 마음이 고맙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도 꼭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 요환. 그리고...”
셀레나가 머뭇거리다가 요환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요환은 한눈에 그 여권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미안해요. 아무래도 당신이 따라올 것 같아서 이건 내가 가져갈게요.”
‘어느새...’
셀레나가 자신의 여권을 들고 있자 요환은 재빨리 여권을 뺏으려고 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스미스에게 제지를 당했다.
“나는 또다시 자네가 사람들이 많은 공항에서 기절하여 실려 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구먼. 내 주먹도 꽤 아플 거야.”
농담처럼 말한 스미스였지만 분명 말에는 뼈가 있었다.
“정말 미안해요. 요환. 나쁘지 않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무사히 핫산 박사님을 모셔올게요. 약속하죠. 요환.”
요환은 하는 수 없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여권이 없는 이상 그는 꼼짝없이 독일에 갇혀 있게 생겼다.
“여권이 없어 문제가 될 때는 아까 내가 준 곳으로 연락하면 다 해결해 줄 걸세.”
스미스가 그를 위한다는 듯 말했지만,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셀레나는 뒤를 돌아 홀로 남겨진 요환을 바라보았다.
그는 덩그러니 남겨진 채 셀레나 일행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계속 들어서인지 더 이상 그를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제길...’
혼자 남겨진 요환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차피 알제이는 나를 죽이지 않는다. 그는 일부로 두 번이나 나를 살려줬어.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거야. 그리고 그는 나를 보고 뭐라고 말하려 했어.’
그가 칼에 찔리기 전 봤던 알제이는 분명 웃으며 그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어.’
요환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대로 셀레나를 보냈다가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미스가 옆에 있어 안심은 되었지만, 그녀 역시 요환과 마찬가지로 제 몸 하나 지킬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내가 옆에 있다면 일단 알제이는 그녀를 해치지 않을 거야. 그녀에게는 내가 필요해.’
오히려 요환과 함께 있다면 알제이가 그녀를 해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셀레나와 스미스의 모습은 벌써 보이지 않고 방송으로 뉴델리행 항공기가 곧 출발한다는 영어 방송이 나왔다.
‘생각하자.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갑자기 그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들었다.
요환은 자신의 옷 안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었다.
요환은 권총을 들고 공항 라운지로 향했다.
커다란 유리 벽 밖으로 활주로가 훤하게 보였다.
요환은 총을 소매에 숨긴 채 남들이 보지 않도록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요환은 유리 벽 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눌렀다.
그러자 총구를 겨눈 방향으로 구슬 모양의 검은 구체가 튕겨 나왔다.
검은 구체는 허공에 떠서 아래위로 진동하고 있었다.
요환은 지체 없이 손가락을 구슬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의 몸은 사라지고 잠시 후 활주로 위에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좋아, 저 비행기군.’
뉴델리행 비행기는 벌써 엔진이 가동하고 이륙 준비를 위해 활주로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은 천천히 이륙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요환은 비행기 경로를 파악한 후 주위를 살폈다.
그의 시야에 순찰용 지프차가 보였다.
‘가까이에 차가 있다니 하늘이 도왔군. 그것도 오픈카라니...’
요환은 몰래 지프차에 다가갔다.
지프차에는 직원이 운전석에 앉아서 자신의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조용히 다가간 그는 권총 손잡이 뒷부분으로 공항직원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려쳤다.
누군가를 가격한 것은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직원이 운전석에서 쓰러졌다.
요환은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미안하다고 외쳤다.
조심스레 바닥으로 직원을 내려놓은 후 차의 시동을 걸었다.
벌써 비행기는 이륙을 위해 속력을 내고 있었다.
“아니, 저 차 뭐야?”
관제탑에서 아래를 보고 있던 한 직원이 말했다.
“활주로에 차 한 대가 난입했어요. 빨리 사람을 불러요.”
관제탑 안은 비상벨이 울리며 소란스러워졌다.
“빨리 경찰을 불러서 저 차를 멈춰!”
누군가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벌써 들켰나 보군.’
멀리서 공항 경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를 향해 활주로를 달려오고 있었다.
경찰차에서는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독일어라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에게 멈추라고 경고하는 다급한 목소리인 듯했다.
요환은 더욱 차의 속도를 높여 비행기에 바짝 붙였다.
어느새 뒤따라오던 경찰차가 그의 바로 뒤까지 도달했다.
비행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 속도를 유지했다.
곧 있으면 이륙할 것 같았다.
“남자가 총을 가졌습니다. 조심해야 해요!”
경찰차에 있던 공항 경찰들이 요환이 총을 꺼내자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 뭐 하는 거야? 미쳤나?”
요환은 왼손으로는 운전대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권총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냥했다.
그때 엔진 소리가 커지면서 비행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요환은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요환은 사라지고 달리고 있던 지프차는 점점 속력이 줄어들더니 이내 멈춰버렸다.
그를 쫓던 공항 경찰들도 차를 멈추고 총을 든 채 지프차로 달려왔다.
하지만 지프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행기를 향해 달리고 있던 지프차를 남긴 채 요환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었다.
비행기는 엄청난 굉음을 내며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경찰들은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피다 하늘로 솟아 버린 비행기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