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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잎 Jan 14. 2024

<수업> 외국어 수업은 역시 말하기

어렸을 때 ebs에서 방영하는 <세계테마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참 재미있게 봤었다. 내가 가보지 못한 '장소'에 대한 동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장소를 소개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컸다. 여행가이드나 번역기 없이 자유롭게 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는 출연자를 보면 단순히 그 사람이 멋져 보이는 것을 떠나 그 장소가 더욱 돋보이기까지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외국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이.




나 역시 언어의 장벽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기에, 외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난 이후에도 외국어 학습의 가장 큰 목표는 '말하기'가 되었다. 특히나 처음으로 제2외국어를 접할 수 있는 중학교 중국어 수업이라면 더욱이 '말하기' 수업을 강조하게 된다. 원어민처럼 정확한 문법으로 유창하게 말하진 못할지라도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말하는 것에 있어 겁먹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내 말하기 수업의 목표이다.


물론 문법 역시 빼놓지 않고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지만, 이 시기의 학생들이 시험에서 문법 몇 문제 틀리는 게 뭐가 대수겠는가. 문법 시험 100점 맞고 현지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꾹 닫고 있는 학생이라면 100점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시험에서 몇 문제 틀렸을지언정 현지에서 더듬 더듬이라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의 단어와 문장을 말할 줄 아는 학생. 그러한 학생이 내 학생들이 되기를 바랐다.



학교 현장에서 말하기 수업은 사실 쉽진 않다. 학교나 학급의 특성마다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튀기 싫어하고 묻어가길 좋아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을 데리고 큰소리로 말하게 하는 것, 그것도 평생 한 번이라도 갈지 말지 알 수도 없는 다른 나라 언어를 수십 명의 학생들 앞에서 말하게 하는 것, 참 쉽지 않다.  


특히나 중2병을 세게 앓고 지나간 학생들을 데리고 중국어 말하기 수업을 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어떠한 모습일지 상상이 될 것이다. 입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입을 열지 않을 "독립운동투사형" 굳건한 의지의 학생들도 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이 학생들을 데리고 말하기 수업을 해야 한다.




간혹 학생들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번역기가 알아서 말도 다 해주는데요?"

   

이렇게 말하는 학생들의 생각도 충분히 공감이 된다. 나 역시 영어권이나 일본, 동남아 국가들로 여행을 갈 경우 핸드폰 번역기 어플부터 키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여전히 번역기는 인간을 이길 수 없다고.


번역기는 외국어 말하기의 아주 좋은 친구인 건 사실이다.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단어나 문장을 쉽고 빠르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필요한 것은 "말하기", 즉 "대화"이다. 일방적인 통보가 아닌 사람 대 사람의 소통이다.


그 소통에는 단순한 사전적 의미의 단어들만 열거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분, 대화의 분위기와 상황 등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고려하여 가장 적절한 단어들로 말이 이어지는 것이 대화인 것이다. 같은 뜻이지만 쓰이는 상황이 미세하게 다른 여러 가지 단어들이 있다. 이러한 단어들을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대화에 '온도'가 담기길 바란다. 아무런 감정 없이 사전적 뜻만 나열되는 대화가 아니라 상대의 온도를 읽고 본인의 온도를 전달할 수 있는 그런 대화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번역기 이전에 머리와 마음으로 그 상황을 읽어내 적절한 단어를 끄집어낼 수 있는 진짜 말하기 실력이 필요한 것이다.




출처 : tvn <꽃보다 청춘> 아이슬란드 편 중에서

 

여행 예능으로 유명한 <꽃보다 청춘> 프로그램에서 믿었던 번역기에 발등 찍히는 사례를 본 적이 있다. "핫도그 세 개 주세요."를 말하고 싶었지만 "핫도그 세계"를 외치는 번역기로 인해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진다.


여행 중 번역기는 필수 어플이다. 하지만 번역기를 맹신하지 말 것을 학생들에게 당부한다. 학교에서의 말하기 수업만으로 현지인과 유창하게 프리토킹할 정도는 안된다 할지라도 여행 시간 절반은 더 아낄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 "핫도그 세 개"를 검색하느라 지체될 시간에 거침없이 주문대 앞으로 걸어가 원하는 핫도그를 주문할 수 있도록, 번역기로 검색할 시간에 원하는 사이드 메뉴 하나를 더 주문할 수 있도록 말이다.

   



1교시에 카랑카랑했던 내 목소리는 6교시가 되면 살짝 허스키해지기도 한다. 학생들 발음을 교정해 주며 하루종일 끊임없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말하기가 핵심인 제2외국어 교사의 숙명이랄까. 학생들을 말하게끔 하려면 교사인 내가 먼저 수십 번을 말해주고 따라 하게 하고 또 같이 말해야 한다. 첫 수업부터 마지막 수업까지 이 단계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목은 좀 아플지언정, 학생들이 큰소리로 중국어를 따라 말할 때는 전율이 느껴지기도 한다. 시종일관 "어디 한번 해보시오. 난 끝까지 말하지 않겠소." 했던 독립투사형 학생들이 결국 입을 열어 따라 말할 때는 살짝 감동이 밀려오기도 한다.  


올해도 중국어 시간에 학생들의 말하기 소리로 복도가 울려 퍼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처음에 쭈뼛쭈뼛 따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학생들이 학기말이 되면 적어도 배운 내용을 토대로 중국어로 '대화'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젠가 학생들이 중국 어디선가 당당하게 번역기 없이 핫도그를 주문하고 있는 순간을 그려본다.



얘들아,
우린 번역기 없이도 중국에서 핫도그 세 개 사 먹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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