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날 May 31. 2024

오늘은 혼자 놀았어

< 걱정 >에 대하여 

아이가 하는 말 중에서 나에게 무서운 것이 몇 가지가 있다. 아이가 학교나 유치원에서 혼자 놀았다는 이야기는 그중 순위가 높다.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날이 한 주 두 주 계속되면, 나는 아이의 사교성이나 교우 관계가 은근히 신경 쓰인다. 나 자신이 '내향'일지라도.


나는 왁자지껄한 환경보다는 오손도손한 상황을 더 좋아한다. 물론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체 안에서도 어떻게든 관계를 만들어가지만, 굳이 둘 중 하나를 뽑자면 나는 단체보다는 소그룹 안에서 더 편하다. 그때 충만함도 더 느껴진다. 말도 더 많아진다. 이런 성향이 바로 '내향'이다.


우리 집 첫째도 '내향'이라서, 단체에 있을 때보다 소그룹으로 있을 때 더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학교에서와 집에서 다른 모습이 있고, 무엇보다 집에 있을 때 말과 개구짐이 훨씬 많다. 둘째는 '더 내향'이라서, 단체든 소그룹이든 편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밖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완전히 무장해제되는 게 곁에서도 느껴진다. 그래서 두 아이는 '혼자서 놀았어'라고 말하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



책을 읽고 싶었어
시원한 곳에 앉아있고 싶었어



아이들이 '내향'인 것을 알고 있어도, 아이들이 '혼자 놀았다'라고 하면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건 쉽지 않다. 나는 그 내막이 궁금해서, 어떤 상황이었길래 혼자 놀기를 선택했는지 아이들에게 다시 묻게 된다. 그 상황을 아이가 선택한 것인지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엄마의 신경씀이 무색하게, 아이들에게 돌아오는 답은 평범하다. 아이는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놀지 않고, 책을 읽고 싶었단다. 어느 날은 유독 교실 안이 더워서, 시원한 곳에 혼자 앉아있고 싶었단다.



그렇지, 너희들에게는 혼자 있을 권리가 있지



단체 안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의 유년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내향'이지만, '외향'인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 친구들은 어디서든 서스름이 없어 보였다. 그 친구들은 불편함 없이 발표도 척척 해내는 것 같았고, 무리 앞에 서는 걸 즐기는 듯 보였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고, 아무에게나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 낯을 가리는 것보다 좋은 것이라는 생각마저 갖게 되었다. 지금은?


내 영역이 지켜지는 게 좋다. 내가 불편하면, 어떤 장소나 관계는 피하면서 내 마음을 지키는 게 좋다. '외향'에게는 친교이지만, '내향'인 나에게는 무례함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기도 하다. 그때는 정중하게 선을 긋기도 한다. 선을 넘으셨다고 알려주는 건 나쁜 것도 아니고, 관계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만의 열정을 쏟을 시간과 장소’가 정말 소중하다. 그래서, 아이들이 혼자 책에 몰입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나, 혼자 시원함을 누리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편하게 해석되는가 보다.


하지만 여전히 '외향'이 부러운 영역이 있다. 내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대중 앞에서 여유를 부리며 발표를 하고 싶다. 사교력을 발휘해야 할 때는 좀 더 활기차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내향' 고유의 특성이나 매력을 스스로 훼손시키진 않으려 한다. 나에게는 '호기심과 열정을 내부로 수렴시키는 힘, 그것을 가꾸고 응축시키는 힘, 그래서 그것을 성취해 내는 커다란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향'이 가진 힘은 '외향'이 가진 것처럼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내면에서 때를 준비하다가 적기에 꽃 피워낸다. 이런 내 모습을 발견하고부터, '외향이 부러웠던 유년시절'의 나는 자유로워졌다.



물론, 아이들이 혼자 놀았다는 이야기가 '내향' 성향에 따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지점이 엄마로서 우려스러운 것인데, 아이들이 혼자 노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살뜰히 챙겨봐야겠지만, 그것은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첫째 육아'를 통해 경험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통해서도. 사회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혼자이냐, 무리 안에 있느냐' 보다는, 그 상황에서 행동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가 아닐까 한다.  


아이가 '혼자' 놀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선택했다면 아이는 지금 자신의 시간과 장소에서 주인이 되어 잘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는 그다음 행동도 선택해 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아이가 어쩌지 못해 혼자 놀았다면? 아이가 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호소한다면? 이때도 역시 그 해결책은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더라. 친해지고 싶은 친구, 그 친구와 해보고 싶은 것들, 그래서 엄마가 도와줄 것들에 대해서 아이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곤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