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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날 Feb 28. 2024

'나답다'는 말


나는 자라며 '자유롭게 나는 새'가 좋아보였다. 이런 내 마음을 뒤집어보니, 그곳엔 자유롭지 않은 내가 있었다.



어디 붙잡혀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갑갑할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갑갑함은 나를 살리는 동화줄이었다. 그 느낌은 ‘나답고 싶어 하는‘ 내가 보내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을 때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도 그럴 때가 있고.


슬픈데, 슬프지 않은 내가 되려고 할 때
떨리는데, 떨리지 않는 내가 되려고 할 때
짜증 나는데, 짜증 나지 않는 내가 되려고 할 때
싫은데, 싫어하지 않는 내가 되려고 할 때
화나는데, 화나지 않은 내가 되려고 할 때



나는 갑갑하다. 그런데, 되고 싶어 하는 (되어야 하는) 모습이 멋져 보이는지, 혹은 그럴 때 칭찬받는 게 좋았는지, 나는 이렇게 되기를 바라며 노력하고 있었다. 때론 지금도.


작은 슬픔 정도에는 의연한 나
하찮은 것에는 떨지 않는 당당한 나
그런 것쯤엔 짜증 내지 않는 합리적인 나
싫은 것도 수용하는 유연한 나
화가 나지 않는 성숙한 나



나는 내가 이렇게 되면 행복할 줄 알았다. 의연하고, 당당하고, 합리적이고, 유연하고, 성숙한 경지를 동경했다. 심지어 한때는 내가 정말 이런 사람이라고 착각도 했다. 그런데 웬걸! 나는 그저 그렇게 되길 바랄뿐이었고, 심지어 그렇지 못하면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평가하기 일 수였다.  



내가 나 자신을 평가하는 삶이란,
얼마나 갑갑한가



나 자신이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평가해 버리니, 나는 외롭더라. 그리고, 이런 내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서, 아이들도 외롭더라. 아이들도 똑같은 잣대로 바라보며 평가하게 되니까. 울면 못난 아이가 되니까.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다른 말들이 내 입 밖으로 나오고 있다. 이때부터 속이 얼마나 시원한 삶인지, 경험해보니 좋다.


슬픈 건 슬픈 거야, 울자.
아, 이번에도 역시 떨리네, 바들바들.
정말 짜증 나. 젠장.  
너 정말 싫다. 그저 싫다.  
아, 화나, 진짜 화나. 나 곧 터진다.


'작은 슬픔, 하찮은 일, 그런 것쯤에, 성숙하지 않은’이란 평가들이 나를 얼마나 갑갑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내 감정을 대하는 데 있어서 이런 수식어를 걷어내면, 이토록 자유로운데 그걸 몰랐다. 물론, 나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걷어낼 수는 없다. 그런데, 그거야 뭐, 그들의 머릿속이고, 나에게는 오히려 '나라는 편'이 생겨서 무척 든든한 걸! 원래 적과의 동침보다, 공공의 적이 있는 상태에서 '우리끼리' 더 돈독해지는 법이잖나.  



나에게 느껴지는 대로 느낄 자유



나에게 필요한 자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평가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이 상태에 있을 때 눈을 감으면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가 자연스레 상상된다. '의젓해서, 당당해서, 합리적이어서, 성숙해서, 강인해서' 자유로운 게 아니었다. 그런 것은 오히려 어떤 조건이 달린 인정이었고, 그것들이 사라진 나도 괜찮아서 나는 자유로운 것이다.


물론 생각이 이렇다는 거지, 현실에서는 여전히 나는 낑낑거린다. 어제 둘째가 어린이집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받으러 혼자 앞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그 상황이 부담스러워 울먹이며 졸업장을 겨우 받아오더라. 그 모습을 지켜보자니, 떨지 않고 당당한 나(너)이길 바라는 마음이 먼저 나에게 치미는 게 사실이다.


이때, 아이의 쭈삣거리는 모습까지도 모두 수용하는 '치밀어 오르지 않는, 성숙한 척‘하려는 내가 고개를 들려고 할 때, 나는 이제 치밀어 오르는 나를 평가 없이 그냥 놔둬본다. 그러면 신기하게, 아이의 아이 같은 모습이 그렇게 귀여워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사람들 앞에 혼자 서있느라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애써 참고 있는 꼬마의 노력이 기특해진다. 올챙이가 꼬리를 달고 헤엄치는 게 나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치밀어 오르는 것을 그냥 놔둔다는 것은



아이에게 내가 듣고 자라난 그 말들을 그대로 반복하며 ‘씩씩할 것을’ 주입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떠오르는 그 말들은 그냥 떠오르게 놔두고, 내게 느껴지는 그 감정들도 그냥 느끼며, 나의 감정에 머물러 본다는 뜻이다. 속상함, 안타까움, 난감함, 답답함, 부러움 등등이 내 속에서 휘이휘익 휘어감길 때, 그냥 그것들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면, 폭퐁우 같던 그 감정들이 작아져서 손안에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그때 아이를 바라보면, 씩씩하진 않지만 그냥 그대로 어찌나 귀여운지! 자기만의 수준과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아이가 참 예쁘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맛! 나도 있는 그대로 괜찮은 마음! 그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나는 뒷다리가 나온 올챙이 쯤? 나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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