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날 Nov 30. 2023

완벽하고 싶어.

<아이의 완벽주의>에 대하여


이 주제에 대해서는 글을 쓰기 싫어서, 내가 얼마나 뺀질거리며 도망 다녔는지 모르겠다. 사실 지금도 내 마음은 저만치 도망가 있다. 연재 발행을 선택하지만 않았다면, 아마 나는 피하고 싶어서 한 동안 글 쓰는 것을 멈췄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 이리저리 도망쳐봐야 무슨 수가 있나. 결국 인정할 건 인정해야 쉬워지니, 뛰쳐나가려는 나 자신에게 따뜻한 차를 한잔 내려서 마시게 하며 물었다. 이 주제에 대해 쓰기 싫은 이유가 뭐니?



수치심이 느껴져서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었다. 내가 아니고 '아이의‘ 완벽주의에 대한 이야기인데, 내가 수치심까지 느끼는 것은 결국 이 주제는 내 얘기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다녀온 동창회에서 친구가 그랬다. "결국 사과는 사과나무 아래 떨어진다"라고. 맞는 말이다. 아이의 완벽주의는 나로부터 시작된 사과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한 동안 나는 나의 완벽주의가 정말 싫었다. 나를 옭아매는 ‘족쇄’ 같았다. 이 지점에 대해서 털어놓기가 힘든 거다. 내 허점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아서...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주제를 쓰겠다고 선택한 것도 '나'라는 사실! 이 주제를 쓰기로 결정했던 이유는 내가 드디어 '그 족쇄 같았던 완벽주의'의 정체를 알아냈고, 그러고 나니 '나의 특별한 초능력 완벽주의'가 새롭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를 글로 쓰는 것은 처음이라 어렵다. 그럼에도 후자에 대해서 써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니, 용기를 내본다.



족쇄 같았던 완벽주의



그것의 정체는 ‘좋은 평가’에 대한 완벽주의였다. 나는 자라나며, 좋은 평가를 받는 것에 크게 의미를 뒀다. 좀 더 과격한 표현으로, 그게 나의 밥줄이었다. 굳이 그 이유를 찾자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이야기라는 점을 감안해주세요, 나는 형제가 많았던 터라 그 사이에서 부모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을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착실한 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부모의 눈에 띄는 방법으로 '잘 하는 것'을 선택했다. 실제로 공부든, 친구관계든 잘하고 싶기도 했고, 잘하려고 노력도 했다.


잘하면 인정을 받으니, 잘 해내는 기준도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랑과 인정은 '조건부'이지 않나. 받아도 받아도 허전하고, 주는 대상에게 의존적이 된다. 나에게는 잘해야만 한다는 "족쇄"가 생긴 것이다. 이게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 그 정체를 알고부터 그것을 벗어버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알기까지가 힘들지, 알고부터는 '행복 시작'이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었기 때문에, 못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나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이들을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지 뭔가! 그래서 나는 아이들뿐 아니라 나 자신도 열심히 '조건 없이‘ 사랑해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나는 '족쇄 같았던 완벽주의'에서 벗어났다.



나의 초능력 완벽주의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이 무슨 드라마 '무빙'같은 말인가 싶지만, 듣고 보면 일리가 어느 정도는 있을 거다. 사람의 능력이라는 게, 하나의 자극으로 꼭 한 가지 능력만 키워지는 것은 아니더라. 아이들이 바깥놀이를 많이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근육'이 발달하게 된다. 그렇다고 단지 신체적 차원에서 '대근육'만 발달하는 게 아니다. 동시에 그 아이에게는 '공간감각'도 키워진다. 나에게도 이게 통했다.


형제들 중에서 눈에 띄기 위해 '좋은 성과'를 내려고 노력한 세월이 있다 보니, 나는 뭐 하나를 만들어도 그 결과물의 완성도가 높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고, 그 그림을 디지털 형태로 전환하는 작업도 진행한다. 과거에는 IT 회사를 다니며 웹 서비스를 기획했는데, 그때도 디지털 형태로 서비스 모형(Mock-up)을 잡아나갔다. 이 디지털 작업을 할 때, 나의 작업 완성도는 1px 이하 차원까지 섬세해진다. 이렇게 눈이 섬세하고 빠르니, 지능검사를 하면 그 분야에서만큼은 '어떤 문제든 가져와봐. 다 풀어주지' 수준이다. 내 의견이 아니라, 해석을 해주신 전문가의 의견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훌륭한 초능력이 '족쇄 같은 완벽주의'에 가려져있는 동안에는 내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힘들 게 하는 부정적인 성향으로만 여겨졌다. 사실 나는 아주 성능 좋은 시지각을 가지고 있지만, 나에게 '자긍심'이 부족할 때면 그것은 어김없이 내가 주변을 의식하고 눈치 보는 도구로 사용된다. 반대로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있는 상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가 이 주제를 쓰기로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나의 완벽주의가 자랑스러우니
아이의 완벽주의도 자랑스럽다



우리 집 첫째 아이는 자신의 입으로도 '완벽하고 싶어'라고 이야기한다. 한 때는 아이가 이 말을 하면,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저런.. 내가 힘든 것을 물려주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능한 아이가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게 하려고, 여러 방법으로 아이의 생각이나 바람을 왜곡시켜보려고도 했다. 아이가 어떤 것에서든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느끼길 바라며, 그쪽으로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회복되니, 이제는 아이의 '완벽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그것을 대하는 마음도 한결 편하다. 이제야 아이가 말하는 문장의 핵심 포인트도 파악이 된다. 아이가 말하는 완벽주의라는 것은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가 아니라, '완성도 높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어'라는 것이 보인다.


물론, 완성도 높은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더 많은 실패가 필요하다. 선 하나를 긋더라도 마음에 흡족한 선이 그어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선을 그어봐야 하는지.. 하지만, 결국 내가 '바로 그 선'을 긋는 순간의 희열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아이가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선'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나는 아이의 '완벽주의'를 응원할 수 있게 되었다.



너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거야
네가 만드는 것은 완성도가 높을 거야



이 말은 '상대방에 의한 평가나 인정'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과 '그것을 이뤄내기 위한 노력'에 대한 것이다. 물론 너무 힘들 때는 '포기'라는 선택도 중요하다. 하지만, '포기'할 때까지 쏟아부어보는 열정과 경험의 가치는 '성공'과 대등하다.


불안이 많은 '봉준호' 감독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성향이 그렇기 때문에, 정말 많이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물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의 영화들인 것이고. 정말 많이 노력한다는 대목에서는 전율이 일며, 유독 더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이 자랑스러워진다.







*연재 브런치북 <우리는 백팀이었다 (2023)>에 수록되었던 글을 수정, 보완하여 재발행하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미인이 아니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